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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인 크림반도 잠입 … 유럽 민족분쟁 불씨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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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러시아 지지 시위에 참가한 시위대를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아르세니 야체뉵 우크라이나 과도정부 총리는 12일 워싱턴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다. [도네츠크 AP=뉴시스]

러시아에로의 귀속합병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16일)를 앞두고 있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는 최근 ‘자유의 전사’를 자처하는 세르비아인들이 잠입하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군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크림자치공화국의 치안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다. 크림반도 전체 인구 200만 명 중 60%가량을 차지하는 현지 러시아인들의 귀속 결정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같은 슬라브계 혈통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민족주의에 입각한 세르비아인들의 크림 분쟁 개입은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는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다.

 크림반도 내 인종갈등도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자치공화국에는 다수 러시아계와 함께 우크라이나계 24%, 타타르계 12%가 살고 있다. 친러시아파가 주도하는 크림의 러시아 귀속이 실현되면 반러시아 감정이 강한 현지 우크라이나인과 타타르인들의 반발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슬람 타타르인들은 터키와 민족적·문화적으로 가깝다.

 크림반도의 분리 위기가 잠재해 있던 유럽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비단 자치공화국 내의 인종갈등에 그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의 세르비아나 터키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등에서 활동 중인 세르비아인들은 거리에서 차량이나 행인 검문 등을 돕고 있다고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차이퉁(FAZ)이 9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크림행을 권유받았다고 밝혔다.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한 세르비아인 전사는 “발칸전쟁 때 러시아인들이 세르비아인을 도운 것에 감사를 표시해야 한다”며 “코사크인들이 러시아를 돕듯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크림반도로 건너간 자국인들이 귀국하면 사법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세르비아인들이 크림분쟁에 직접 휘말리게 되면 국익을 훼손하고 외교문제로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세르비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우방관계이지만 크림공화국의 러시아 귀속 움직임을 바라보는 입장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2008년 2월 세르비아로부터 떨어져나간 알바니아계 코소보의 분리독립을 러시아가 합법화해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며 크림반도 분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 6개월 후 조지아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분리독립을 승인해 세르비아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의 이율배반적인 이중잣대도 논쟁거리다. 모스크바는 코소보의 독립은 승인하지 않으면서 크림반도 주민의 자결권은 부추기고 있다. 반면 서방은 코소보의 분리는 인정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영토는 온전히 보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림반도 내 28만 명이 거주하는 소수민족 타타르인의 대응도 유럽에서 민족주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불씨가 될 수 있다. 투르크계인 타타르인은 크림반도 원주민으로 15세기 크림한국을 세웠다. 이 나라는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합병됐다. 타타르인은 소련 스탈린 시대에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중앙아시아 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40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야 크림반도 귀환이 허용됐다. 지난달 26일엔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 의회 앞에서 친러시아파 주민과 우크라이나 잔류를 바라는 타타르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크림 위기 악화로 민족분쟁이 불거지면 타타르인 다수가 터키로 대거 유입될 수도 있다. 터키로서는 이들을 받아들일 경우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어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방문한 아흐메트 다부토글로 터키 외무장관은 “크림 위기가 타타르-러시아, 터키-러시아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를 우회하는 러시아의 가스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터키로서는 크림 타타르인의 문제로 러시아와는 등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터키는 흑해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와도 전략적 협력, 비자 면제협정 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러시아 쪽으로만 기울 수도 없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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