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열사 단식순절설|70년만에 주화란대사관서 자료 새로발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파리=주섭일특파원】이준열사는 나라 잃은 슬픔을 못이겨 식음을 전폐한 끝에 순절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는 주화란대사관 근무 이수정공보관이 을사보호조약체결 직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밀사3명의 행적을 조사하던중 화란외무성·국립 자료보관소·각 언론기관의 자료실등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것. 이 학설은 『종기수술경과의 악화로 이열사가 죽게되었다』는 당시의 일간지 「헤이그·수크란츠」의 보도(1907년7월17일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1907년에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기간에 「헤이그」국제평학협회가 매일 불어로 발행한「구리어·드라콩·히랑소·드라폐」(국제평화회의보)에 따르면 7월14일밤 이준열사가 운명하던 당시 함께 파견됐던 이위종은 3일전 「레닌그라드」에서 대한제국공사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만나「러시아」황제에게 직소키위해 떠났고 이상설과 여관주인만이 임종을 지켰다.
비보를 듣고 18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위종은 이상설과 여관주인이. 본 임종모습을 20일자 「평화회의보」에 『이준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긴 했으나 매우 건강했다. 죽기전까지여러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죽기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를 강탈하려합니다」면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부짖다 곧 숨을 거두었다』고 증언했다.
이수정공보관은 이위종이「레닌그라드」로 떠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도 종기자제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렸다.
결국 이열사는 천신만고 끝에 예비회담에서「한국독립을 위한 진점서」를 채택키로 의안을 통과시켰으나 본회의에서 일본대표들의 방해공작으로 좌절되자 이에 흥분, 상심끝에 식음을 전폐하다 분사한 것이라는 것.
「헤이그·슈크란츠」 지는 그후 9월7일의 이준열사의 정식장례식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하고 이 자리에는 이열사의 동생 이운씨와 각국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서울로 운구하려 했으나 이미 을사보호조약이 발동되었고 궐석재판으로 이위종은 사형, 이상설·이준은 무기징역이 선고된 형편이어서 이를 포기했다고 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