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봐르」 도움받아 책 쓰겠다"|70회 생일맞은 「사르트르」, 「누벨·옵세르봐톼르」지와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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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장·폴·사르트르」가 70세 생일을 맞았다. 하나 남은 왼쪽 눈마저 거의 시력을 잃어 이제 더 이상 작가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한다. 다음은 「프랑스」의 「누벨·옵세르바톼르」지와의 「인터뷰」를 요약한 것이다.
-당신은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명예를 얻는 두 가지 야망을 가졌다는데 언제부터 그 야망을 달성한 줄 알았는가?
『나는 항상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전까지는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작품을 권하고 싶은가?
『「상황」 「셍·주네」 「변증법적 이성비판」 「악마와 신」 등을 권하고 싶다. 「상황」은 가장 철학에 가까운 비철학서이다. 그 외에 문학서로는 「구토」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선생이 선전의 명수라고 하던데?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선전을 위해 무엇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선생은 언제부터 늙었다는것을 느꼈는가?
『그건 복잡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1km도 걷기 힘들면 늙은 것이겠지만 나는 50세의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70세라면 늙은이가 아니겠느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괴롭고 귀찮은 일이다.』
-선생은 사람들을 설득시킬 정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는데?
『한때 나는 내 앞에 사람이 있으면 그를 설득하고 싶은 정열이 솟아났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한 유일한 것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글을 쓰는 것이었다.』
-새로온 친구 사귀기를 좋아할 때도 있지 않았는가?
『전후에는 「헤밍웨이」 「도스·파소스」 「콕토」 등과 사귀었다. 그 시절엔 많은 사람들이 날 찾아왔었다. 그러나 나는 만찬에 초대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곳에선 식사를 하기보다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한다. 나의 영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영향이다. 나는 내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상상」이나 「말」등에서 내 생각들을 많이 썼지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다른 책을 쓰고 싶다. 그것이 앞으로 「보바르」와 같이 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갈데도 별로 없고 내 생활은 아주 단조로울 뿐이다. 아침엔 8시반에 일어난다. 「시몬·드·보바르」 집에서 자주 자고 「카페」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집으로 돌아온다. 하오 2시나 되어야 점심을 먹고 4시까지 「카페」에서 쉰다. 가끔 「보바르」와 저녁을 먹기도 한다.』
-선생이 음악을 좋아하는 줄 잘 모르는데?
『음악은 때로는 기분전환으로 또는 지식의 기본요소로서 나에게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나의 집안은 모두 음악가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피아노」, 어머니는 「피아노」와 노래까지 했다. 두 삼촌은 훌륭한 「피아니스트」고 숙모와 사촌도 음악가다. 「슈바이처」 집안이 이랬듯이 나는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나는 「쇼팽」이나 「베토벤」의 어려운 「소나타」도 칠 줄 안다. 나는 또 「바리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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