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 외면받던 와인이 졸지에 스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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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3면

바게트라는 프랑스 국민 빵은 긴 막대 모양으로 겉은 파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며 구수한 향기가 일품이다. 필자가 젊은 시절 몇 년간 살았던 노르망디의 작은 동네에는 직접 빵을 굽는 빵집이 두 군데 있었다. 때문에 바게트만큼은 매일 아침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쪽 빵집에는 긴 줄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는 줄이 없었다. 필자는 기다리는 것이 싫어 줄 없는 빵집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줄을 한번 서보았다. 과연, 이 집 바게트는 먼젓번 집 것보다 훨씬 구수하고 맛있었다. 식기 전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강의가 없는 휴일 아침이면 이 같은 기쁨은 배가 됐다.

김혁의 와인야담 <10> 보르도 빈티지시음회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긴 줄이 서 있는 빵집으로 향하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반대쪽 빵집에 긴 줄이 있었다. 매일 사먹는 빵집에는 줄 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드디어 이 빵집이 새로운 맛을 창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맛있는 빵집이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난 것이었다. ‘바캉스로 2주 동안 문 닫음’. 다른 쪽에 줄 선 사람들 모두 필자가 팻말을 읽고 있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모두 그렇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빵 맛이 그렇게 앞집과 비교되는 것을 알면서 그 빵집은 왜 아무 변화도 없이 계속 문을 열고 있었을까? 혹시 필자가 모르는 그 집 빵만을 고집하는 매니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자는 보르도에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곤 한다. 매년 4월 초가 되면 보르도 그랑 크뤼 협회 130여 개 샤토들의 신생 빈티지 시음이 있다. 각국의 와인 전문가들이 참석해 꼼꼼하게 시음을 하고 그 결과를 와인 잡지나 웹사이트에 올린다. 필자는 1999년부터 매년 참석하고 있는데 시음회가 열리는 첫날과 마지막 날 샤토 오너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 음식은 외부 케이터링을, 와인은 각 샤토들이 3병 정도 가져온다.

130개 샤토 중에는 가격이 비싼 와인부터 저렴한 것까지 다양한데, 누구나 좋은 와인을 마시려고 하기 때문에 눈치 작전이 치열하다. 우선 와인은 한 장소에 모아놓았다가 테이블로 각자가 마시고 싶은 와인을 가지고 간다. 경쟁은 아주 심하다. 먼저 테이블로 갖고 가는 사람이 임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와 점잖음을 잃지 않는 정도에서 서두른다. 첫 코스가 나올 때쯤이면 대부분 와인이 테이블에 올려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간택(?) 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랑 크뤼들이 여럿 있다. 우리나라 시장에 오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와인들이다.

남은 와인 샤토의 오너 마음은 어떨까? 너무 풍요로워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와인이라니…. 하지만 남겨진 와인일지라도 그들만으로 만찬을 할 때면 주인공이 되고 그런 와인을 꼭 필요로 하는 소비자도 있다. 3년 전, 매번 ‘풍요 속의 빈곤’으로 취급받던 와인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그날 그랑 크뤼 멤버들이 가져온 2005년도 빈티지가 모두 닫혀 마시기 어려웠다. 그런데 매번 선택받지 못했던 바로 그 몇몇 샤토의 와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 샤토 주인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며 자신의 와인을 한 잔씩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누가 2005년이 닫혔다고 말했는가?”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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