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4)-상해임시정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반탁·신탁으로 민족이 갈러 매일 혼란을 거듭하는 국내정국의 소용들이 속에서 임정은 민족주체성과 자주독립만을 주장, 타협을 몰랐다.
당시 국내 정계는「하지」사령관의「백·업」을 맡고 있는 김규직씨와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수립하자는 이승만박사 및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이 나라를 영구히 갈라놓을 것이라는 전제아래 이를 반대하는 김구주석으로 갈려 있었다.
이박사와 김구주석은 반탁과 반공의「슐로건」을 내건 점에 있어서는 입장이 같았으나 통일방법에 있어서는 이견을 갖고 있었다.
임정과 한독당은 이때부터 전국적인 조직을 봉해 남한단독경부수립안과 신탁통치 모두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임정은 매일 청년단체를 비롯한 시민들을 총동원하여 신탁통치 반대「데모」를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간부들을 각지방으로 파견하여 반탁「데모」를 전국규모로 확대토록 독려했다.
경기도에 신악희, 충청도에 조완구, 경상도에 조소앙, 전라도에 나, 강원도에 엄항섭 등이 파견됐다.
김구주석도 직접 반탁운동 독려를 위한 전국순회에 나섰다.
첫 기착지는 인천.
백범과 인천은 퍽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맨 처음 일인장교 「쓰지다」를 죽인 죄목으로 22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옥, 도주한 곳도 인천이요,39세때는 17년 징욕수로 갖은 고통을 다 겪은 곳도 인천이었다.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열렬한 환영을 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어 백범은 공주의를 거쳐 충남산을 찾아 거이길사의 미망인을 위로했다.
삼남 지방의 순시에서 백범은 안내로 창설초기의 우리 해군모습을 보기도 했고, 이어 등지를 돌아 북으로 돌아보고 귀경했다.
1947년 초여름.
임정은 이북땅에 묻힌 이동령·거리 두 선배동지의 유골을 봉안하기로 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이때 한독당은 전국적인 지방망 조직을 마쳐 당원만도 1백20만이 넘는 게 1당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46년4월 당세확충과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안재홍의 국민당과 권동광의 신한민족당을 흡수, 개편한 것이 말썽이었다.
국내에서 흡수한 이들 국내파와 상해에서 들어온 해외파간에는 같은 내에서 사사건건 대립을 일삼았던 것이다.
1947년 5월10일.
서울 진노에 있는 천도교대강당에서는 한독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구주석은 부위원장인 조소앙에게 대회운영일체를 맡기고 기념식과 전당대회에 참석치 않았다.
그러나 백범이 없는 전당대회장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신한민족당 계열은 떨어져 나갔고 국민당계도 이탈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해11월「유엔」총회에서『한국의즉시독립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파견결의안』이 가결되자 이박사를 비롯한 한민당·대한민국촉성국민회등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위한 총선거를 강력히 주장했고 김구주석과 임정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다음해인 48년 2월2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표대회에서「30년의 법통정부인 임정」을 추대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가결했으나 이박사를 비롯한 국내 정계에서는 임정의 법통문제를 아예 무시하러들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같이 국내정국이 시끄러울 때에 임정과 백범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연이 생겼다.
즉 47년12월2일 괴한의 총탄으로 피살된 장덕수의 살인사건 관련험의 인물로 한독당중앙위원이며 비상국민회의정무위원인 김석황이 체포된 것이다.임정과 백범의 반대세력에서 장씨의 살해사건을 한독당이 저지른 것으로 계속 몰고갔던 것이다.
48년3윌12일.
군정청 법정에서 열린 장덕수 살해사건 8회공판에 백범이 마침내 증인으로 출두케 됐다.
이때 하수인인 박광왕과 배희범이 공판정에서 『백범선생을 배후 조종자로 모는 것은 전민족적인 모독이며 백범을 매장하려는 모측의 조작』이라고 항의, 그의 무관을 주장했다.
백범의 이 같은 부운은 임정의 활동에도 즉각적인 영향이 왔던 것은 물론이다.
특히 백범이 남북협상을 한다고 48년4월19일 평양을 다녀온 이후 한독당과 임정은 그 명맥조차 유지키 어려웠고 5·10총선으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임정은 30여년에 가까운 파란만장한 활동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