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내일은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극히 찰나적인 다짐을 수 없이 되풀이하는 한국의 젊은 세대는 슬픔을 자기 것으로 아는 슬기로움에 자랑스럽고 기쁨을 남의 것으로 건넬 줄 아는 겸손함에 긍지를 느끼는 것 같다.
대학의 문이 다시 열리고 만족과 불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연의 기쁨은 더 없으리만큼 그들에게 다시 주어졌다.
한 때「세대교체」를 부르짖으며 열광하던 젊은 한국의 사자들이 전세계 청년들의 창경이 되었었음을 잊기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구축하는 이상향을 소도로 꾸미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이른바 「혁명세대」의 출현이 한국사회에 미친 여파는 너무도 커서 지성의 아량으로는 그 커다란 공간을 메울 수가 없으며 젊음의 뜨거운 힘으로도 군열의 틈을 막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동거리를 배회하며 한 것 고고해지고 싶은 기분을 가지는 것은「바이런」의 광기를 본받자는 이야기인가, 환각제 내음 같은 유혹의 힘에 이끌리어서인가, 그도 아니면 고성방가하는 고궁에서의 늙었다고 보기에는 아프도록 애처로운 그들 어머니의 회춘의 심리를 본받아서인지 조그마한 실망을 감출 수가 없다.
장발이나 「팝송」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또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이라며는 무엇이든지 허용하고 예쁘게 보아주고 싶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진지한자세로 사물을 보는 슬기로움과 밝은 눈빛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변함없는 내 마음이 조용히 무너질 때 실망의 소리는 잊기 어려운 아픔이 된다.
여기 변함이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것은『나는 남과 아예 떨어져서 나 자신을 닫아버리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인간의 비극적 단절을 외친「카프카」를 기억하고 살아야할 가치여부를 논한「알베르·카뮈」의 말을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은 터질 듯 부푼 이상의 만족으로 어른스러워야한다.
열릴 곳에는 흥미를 잃으며 닫힌 곳을 동경하는 비정상적 사고방식이 오늘의 절름발이 청춘상이다.
우리한국은 생활의「언밸런스」를 어느 정도 극복했을 때부터 젊은이문제가 항시 사회문제의 핵이 되어왔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용기를 잃은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했으며 꿈을 잃은 그들에게 꿈을 키워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할 줄을 알면서도 임밖에 내놓고 고맙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막연히 젊다는 재산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천부의 조건에 그저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문을 막아서는 기성세대에게 들을 던지면서도 집안의 늙은 부모에게는 고개를 숙일 줄 아는「야누스」의 얼굴이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 얼굴이다.
왜 좋고 어째서 나쁜 것인지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이제는 쓸데없이 생맥주 집에서 술과 담배로 시간을 잊으려하는 궁상을 떨 필요도 없으며 한번쯤은『너 자신을 조국은 소중히 필요로 한다』라는 부름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자긍을 느낄 수도 있게 됐으니 말이다.
정부에서는 8월말까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한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조국이기에 앞서 나의 조국이기도 한 대한민국의 땅을 그들에게만 지워줘야 하는가 하는 씁쓸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젊고 활기찬 가슴으로 보다 넓고 보다 높은 내일을 향해 힘차게 뻗쳐 나갈 우리의 젊은 세대가 믿음직스러워 때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제 젊은 세대다운 모습을 기대할 수가 있다는 기대에 생동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듣고 싶을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