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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립스틱, 그 마법의 물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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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쓰면서도 미처 몰랐던 그 은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바로 립스틱 얘기입니다. 립스틱은 들여다 보면 볼수록 정말 요물입니다. 일개 화장품 하나가 경기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기도 하고, 남녀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기도 하니까요. 남자는 립스틱 바른 여자 입술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그래서인지 여자는 립스틱 하나로 왠지 당당해집니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등장하는 립스틱 효과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 그보다 여자들이 립스틱에 집착하는 이유는 과연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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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싼 값에 부릴 수 있는 마법

“나는 스타야. 나는 아시아의 별이야. 나는 국민여신이야. 병원 패션도 내가 일인자여야만 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속 여배우 천송이(전지현 분)는 맹장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삐뚤빼뚤 립스틱을 바른다. 대체 립스틱이 뭐길래, 자타공인 국민여신이 병원에 가면서조차 꽉 쥐며 놓치 못한 걸까. 립스틱은 대체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경제적·사회심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석했다.

이성 마음까지 쥐락펴락

사실 드라마 속 여배우만 립스틱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많은 여성에게 립스틱은 제각각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누구에겐 외출 준비를 마치며 행하는 의식(儀式)의 도구이며, 또 다른 누구에겐 엄마에서 여자로 변신시켜주는 요술 지팡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자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지만 여성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공통점은 하나 있다. 립스틱을 바르면 왠지 자신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립스틱을 안 바르고 나가면 왠지 위축된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여성도 립스틱만은 챙겨바르는 경우가 많다. 화장품 많이 쓰기로 유명한 한국 여성이지만 숱한 메이크업 화장품 가운데 립스틱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건 다 이런 이유일 거다.

립스틱은 이렇게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라 여성 자존감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경쟁심리”로 해석한다. 그는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는 건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겠지만 같은 여성 사이에서 돋보이고 싶은 심리가 크다”며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이 메이크업이고, 메이크업 중에서도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립스틱”이라고 분석했다.

이성(異性)의 관심을 끄는 효과도 분명히 있다.

비언어적 의사소통 연구로 유명한 영국 심리학자 제프리 비티는 2010년 맨체스터대학 교수 시절 재밌는 실험을 하나 했다. 남성 50명에게 다양한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며 눈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고 있으면 입술에 더 주목했다. 입술에 평균 7초를 할애하는 동안 눈은 0.95초만 봤다. 반면 화장하지 않은 여성 이미지를 보여줬을 때는 평균적으로 입술(2.2초)보다는 눈(2.97초)이나 코(2.77초)를 더 오래 쳐다봤다.

한국 남성도 다르지 않았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가 지난해 비슷한 실험을 했다. 남자들은 립스틱 바른 여성은 6.38초 동안 바라봤지만 안 바른 여성에게는 1.12초만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립스틱 하나만 더 발랐을 뿐인데도 단숨에 이성의 주목을 받는다는 게 실험을 통해 증명된 셈이다.

전지현 등 숱한 여배우와 작업을 같이 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손대식 실장은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입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배우들은 자기의 기존 얼굴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서도 더 좋은 이미지로 변신하고 싶어한다”며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게 과감한 립스틱 연출”이라고 했다.

립스틱 효과는 없다?

립스틱은 이런 마법을 싼값에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극대화한다. 립스틱 효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잘 알려진대로 립스틱 효과란 경기불황일 때 저가로 소비자를 만족시켜주는 상품이 잘 팔리는 현상을 말한다. 지갑이 얇아져 비싼 샤넬 핸드백을 사기 어려우면 대신 샤넬 립스틱을 산다는 개념이다.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맥 박미정 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9년 국내 립스틱 매출이 전년에 비해 40% 이상 성장했다”고 말했다. 일본식 장기 불황 우려가 불거지던 지난해에도 23% 성장률을 보였다고 한다. 박 부장은 “소비심리가 위축됐을 때 국내 립스틱 판매가 크게 늘었다”며 “립스틱 효과, 즉 적은 비용으로 분위기 변화를 주려는 고객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한상훈 원장은 “경기불황과 립스틱 판매량 사이의 상관관계는 찾기 어렵다”고 정반대 얘기를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2009년엔 립스틱뿐 아니라 국내 화장품 시장이 두 자릿수 성장을 했다. 하지만 이는 경기와 무관하게 립스틱 시장 자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립스틱 뿐만 아니라 1인당 화장품 소비액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박은경 삼성증권 책임연구위원은 “립스틱 뿐 아니라 화장품 업종 자체가 경기를 잘 안 타는 경기방어주 성격을 띤다”며 “2000대 이후 화장품 회사 주가는 경기와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립스틱 경제학』을 쓴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사회에서 떠도는 속설이 실은 진실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며 “립스틱은 이제 필수품에 가까워 불황이든 호황이든 상관없이 산다”고 말했다. 다만 경기가 안 좋으면 평소 사던 다른 비싼 화장품을 덜 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값이 싼 립스틱이 잘 팔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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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장품 업계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제품은 일명 ‘전지현 립스틱’으로 불리는 입생로랑의 립스틱 52호 로지 코랄이다. 배우 전지현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바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신드롬이라고 할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1월 한달 동안 2500개 넘게 팔렸고, 전국 5개 매장에서 1만 개 이상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급물량이 달려 현재 품절 상태다. 아예 예약 주문도 받지 않는다. 국내에서만이 아니다. 한국인이 가는 해외 면세점 등에서도 해당 제품이 품절 상태다.

사실 전지현 립스틱보다 앞서 송혜교·소이현·윤은혜 립스틱도 비슷한 인기를 끌었다. 많은 여성들이 몇달을 기다리거나 해외에서 웃돈을 주고 직접 공수해오면서까지 당대 유행 립스틱 확보에 열을 올린 거다. 과거와 달리 엄청나게 많은 국내외 화장품 브랜드에서 다양한 제품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이처럼 특정 제품에 여전히 쏠림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서울대 곽 교수는 “트렌드를 주도하는 그 연예인만큼 나도 유행을 앞서 가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위 ‘○○○ 립스틱’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집단에 속한다는 자부심을 스스로 느낀다는 얘기다. 연예인 본인의 패션감각이나 미모도 중요하지만 특히 극 중 캐릭터가 재벌가 상속녀 등 상류층이나 톱스타 등 선망하는 인물로 나올 경우 그 배우가 바른 립스틱에 대한 추종 강도가 더 세진다. 엔프라니 마케팅팀 양자랑 대리는 “여배우가 아무리 예뻐도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평범한 캐릭터로 나왔을 때 그 배우가 바른 립스틱이 인기를 끈 걸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부산대 조 교수는 “한국 소비자는 얼리 어댑터 성향이 강해 오래 써봤다는 것보다 남보다 먼저 사용해봤다는 데 더 가치를 둔다”며 “새로운 걸 좇으니 스스로 유행을 만든다고 자부하는데 실은 유행을 좇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연구교수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본다. 그는 “과거 연예인이 쓰는 제품을 똑같이 구매하는 이유는 ‘선망’이었다”며 “지금은 선망보다는 오히려 경쟁심이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스스로 그 연예인만큼, 혹은 그 연예인보다 더 멋지게 이 립스틱을 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등장으로 연예인 등 유명인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연예인을 과거보다 더 친근하게 느낀다”며 “연예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순히 연예인 따라하기가 아니라 그 연예인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제품을 산 후 다르게 응용하면서 친구랑 경쟁하듯 한다는 것이다.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도 “과거엔 연예인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여겼다면 이젠 ‘나도 얼마든지 연예인이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며 “무조건 연예인을 한 수 위로 인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모방하기보단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형한다”고 말했다. 특히 SNS 등장 이후 모두 자기 스스로가 주인공인 왕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대 유명 연예인과의 경쟁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한 가지 분석을 더 곁들였다. 바로 연예 권력이다. 그는 “추종이든 경쟁이든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는 연예인이 소비의 표준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연예인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보다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립스틱에 열광하는 게 마치 한국만의 특성인 것처럼 말하는데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에도 다 있는 현상”이라며 “다만 한국은 좁은 땅에 모여살다보니 유행속도와 이슈를 받아들이는 강도가 더 강한 것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전 교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수시장이 워낙 작아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고 강하게 확산한다”고 동의했다.

안혜리·윤경희·심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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