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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임시 혁명 정부 PRG와 월맹|그 역관계와 4·30후의 전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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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PRG(월남 임시 혁명 정부)가 월맹의 예속 단체냐, 아니면 독립된 별개의 권력 집단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껏 물리지 않은 숙제 가운데 하나다.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부에서 철수치 않은 월맹군 요원(약5천명)과 재남파 된 남부 출신 공작원들로 조직된 「베트콩」은 당초 「정글」에 숨어 있던 소규모 「게릴라」에 불과했다. 「베트콩」은 60년 12월 20일 정치 조직인 「민족 해방 전선」(NLF)을 창설하고 구정 공세 직후인 68년 4월엔 「사이공」과 「후에」 시의 지식층을 규합, 「민족·민주·평화 세력 연합」(민민평)을 결성했다.
69년 9월엔 다가올 휴전 협상에 대비, 「해방 전선」과 「민민평」을 토대로 「임시 혁명정부」(PRG)라는 행정부를 수립했다.
「해방 전선」은 30여 개의 정당·단체로 구성된 연합전선이지만 핵심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인민 혁명당이다.
해방 전선 등 「베트콩」의 성격에 대해 자생설과 조작설의 두 가지 견해가 대립돼 왔다.

<당초 소규모 게릴라>
자생설은 외세와 「고·딘·디엠」 정부의 탄압에 대한 민중의 광범한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반정부·반외세 운동이 바로 「해방 전선」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베트콩」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월남 정부와 미국을 공격하는 「양날의 칼」로 이용돼 왔다.
조작설은 「하노이」가 월남 적화 혁명을 위해 만들어 낸 하부 기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해방 전선은 60년 9월 월맹의 노동당이 『남부의 해방을 위해 노동 동맹을 결성하고 반정부·반미 세력을 규합, 민족 통일 전선을 수립해야 한다』는 「월남 혁명의 일반 과제」를 채택한 지 3개월만에 결성됐다.
또 그 성격과 조직·목표가 월맹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 인지 문제 전문가인 월남의「황·반·치」씨는 그 둘을 「두개의 물방울」에 비유했다.
조작설은 미국과 월남의 견해를 대변한 것으로 미국은 여기에 근거하여 국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월남전 개입을 확대했다.
결국 「고·딘·디엠」의 탄압과 부정·부패 및 외세 개입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해방 전선」을 급속히 성장시켰으며 「하노이」 지원이 민중의 조직화, 조직의 대중화를 촉진한 셈이 되었다.
「베트콩」 전문가인 MIT교수 「더글러스·파이크」는 『해방 전선은 그들의 주장처럼 고유의 독자적인 조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월맹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는 단순한 망치도 아니다. 그들은 개별적인 존재면서도 밀접히 관련된 통일체』 라고 설명했다.
월맹은 「해방 전선」의 조직 과정에서는 물론 정치·군사·이념·재정적인 면에서 절대적인 지도와 원조를 부여해 왔다.
「파이크」에 의하면 월맹은 당초 이념적인 지식과 지도층 인사의 두 분야에 만 지원하다가 64년부터는 공격 무기·병력을 대량으로 남파했고 최근엔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지원하고 있다.
「베트콩」의 예산은 세금(40%)과 전채(40%) 방법에 의한 현지조달이지만 나머지20%는「하노이」 부담으로 돼 있다.(65년 현재)

<공군 절반이 월맹군>
현재 남부에 있는 공산군 40만 명중 20만 이상이 월맹 정규군으로 알려졌다. 30일 「사이공」에 입성한 군인 가운데도 상당수가 월맹 정규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월남측 자료에 의하면 「베트콩」의 최고 지도자는 「해방 전선」 중앙위 의장이며 「혁명 정부」평의회 의장인 「구엔·후·토」(65)로 돼 있으나 실권은 「해방 전선」 서기장 겸 「혁명정부」 수상인 「휜·탄·파트」(62)가 쥐고 있다.
PRG각료의 평균 연령은 56세, NLF는 65세로 비교적 고령층에 속한다.
「베트콩」 지도층의 대부분은 「레·두안」 46년부터 52년까지 남파되어 혁명운동을 지휘하고 있을 때 전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미국측 자료에 의하면 「베트콩」 지도부의 인맥은 「레·두안」 「휜·탄·파트」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맹 지도층은 토지가 천박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출신의 하류층이 많고 따라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
게다가 30년대부터 호지명과 함께 항불·항일·반미 투쟁을 벌여 온 혁명운동의 「베테랑」들이다.
그러나 「베트콩」 지도부는 중요한 「메콩·델터」를 배경으로 한 남부의 중·상류층이며 따라서 「프랑스」나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혁명운동에 가담한 것도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여서 그들은 골수 공산 분자라기 보다는 월남의 정치 상황에서 배출된 반정부 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점에서 양쪽 지도층 사이엔 잠재적인 대립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68년의 「테트」 공세 때까지 만해도 군사적인 면에서 「베트콩」이 공산군의 주력을 이루었었으나 그후 월맹군이 증파 됐고.
구정 공세 때 「베트콩」 간부가 많이 소모되자 이를 월맹이 보충, 남부에서의 균형이 「베트콩」에 불리해졌다.

<우선 비공산세 제거>
73년 1월 「파리」 협정 체결 때는 「베트콩」이 미국·월맹·월남과 함께 조인 당사국이 됐고 특히 남부 월남에는 두 개의 정부, 두 개의 군대, 두 개의 지배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협정상 확인돼 「베트콩」의 지위가 월남 정부와 대등하게 격상됐다.
그후 「베트콩」은 안으로는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위신 제고에 더욱 역점을 두어 왔다.
이 같은 자주적 성향은 월남 전역을 장악한 이후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공동의 적이었던 「사이공」 정부와 미국 세력이 제거된 지금 월맹과 「베트콩」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
남부가 공산화됐다고 해서 월남의 통일이 즉각 이뤄지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15년간 통치 세력으로 성장해 온 「베트콩」과 월맹간의 권력 및 기구 조정 문제를 비롯, 많은 정치적·행정적인 난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체제와 체질이 정치적 이상 같고 ▲단기적으로는 「사이공」 정부 타도와 비공산 세력 제거 ▲장기적으로는 국가 통일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 결국 두 집단의 합일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구종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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