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울|조의설<연세대 전 부총장·현 명예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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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쟁을 내세우면 평화가 위축되고 평화를 제창하면 전쟁이 고개를 숙인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평화와 전쟁은 인류역사상에 있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또 앞으로는 다시 이런 반복이 없어질 것인지 세 살 난 어린이도 전쟁이란 무서운 것이고, 평화란 즐거운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또다시 반복해야만 하는가.
지성인은 전쟁을 비난하고 평화를 예찬하지만 또 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사태가 인간의 성 선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성악에서 오는 것인지. 인류의 참상을 여실히 가져다 보여주는 전쟁을 다시는 일으켜서는 정녕 안될 것으로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고 하니 인간의 성선 보다 차라리 성악을 시인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전쟁을 계속하다가 한편 이기진맥진해지면 평화조약을 제시하며 쌍방이 합의하면 조약이 체결된다. 이것으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 또 다른 면으로 따져 보면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살려면 투쟁력이 매우 필요하다. 총·칼·대포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은 아닐 망정 보이지 않는 무기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으레 전쟁도 예상된다. 인간경쟁에 패하면 이것을 낙오자라고 한다. 여기에서 승리하면 그에 따른 영광의 관을 씌워 준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누가 그 경쟁하는 마당에서「최선」을 다 하였는 가이다. 싸울 때에는 쌍방이 다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겠지만 어느 쪽이「더」최선을 다 하였는 가가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역경에 처하였을 때, 난국에 처하였을 때 이것을 능히 뚫고 전진하는 용기도 결국은 투지력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인간은 본래 호전적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닌 가고 상상도 하여 본다.
모르면 서먹서먹하고, 알면 친밀감을 갖는 것이 인정이다. 먼데 살아도 알면 친해지고 가까운 거리에 살아도 모르면 경원하며 원수가 되기도 한다. 아는 사이를 더 잘 알게 하고, 모르는 사이라면 그 장벽을 철거하는 것이 바로「교류」혹은「접촉」이라는 것이다.
문화교류, 인간 접촉은 예부 터 있었지만 이것들이 일단 궤도에 오른 것은 19세기부터이고 이것들이 본격적인 활동으로 나타난 것은 제2차 대전 이후부터였다. 인류사회의 평화기구「유엔」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유엔」의 운동은 계속되고 있지만 역시 세계의 구석구석에서는「전쟁선포」도 없이 전화가 뒤끓고 있다. 그렇다고 평화운동을 중단할 수는 없다. 또 중단해서도 안 된다.
전쟁과 평화는 생각해 보면 종이 한 장의 앞 뒤 같다. 그러나 실제 면에서 보면 전쟁상태와 평화상태는 하늘과 땅 같은 격차가 있다.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후회하며 울고불고 하며 다시는 재발이 없을 것 같이 발광적이지만 얼마 안 가서 또 전쟁이 재발, 삼발…계속해서 일어난다.
전쟁의 필연성을 긍정한다면 평화의 필연성도 긍정 아니할 수 없다. 평화가 될 수밖에 없어서 평화가 이룩되기 때문이다. 전쟁의 입장에서 보면 평화는「휴전기간」을 말하는 것 같고 평화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다음의 휴전」의 가능을 제시하여 주는 말 같다.
인류의 역사는 평화로 보다 전쟁으로 진전되는 것 같기만 하다. 왜 이런 착각을 갖게 되는가. 우리의 목전에는 동남아의 사태가 매일매일 사실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며 그보다 우리의 정세가 현실적으로 전쟁과「직결」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가 모두「필연성」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역시 평화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 평화지향 수단의 하나로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동질적인 문화의 교류보다 이질적인 교류가 더 신속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남의 것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좋지 않으며 내 것만을 상대편에 강요하는 것도 불순한 행동이다. 남의 것을 받기도, 내 것을 주기도하는 경신으로 진정한 문화 국의 질량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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