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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캐나다의 「패션·디자이너」 박인희 여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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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 여사의 첫 사업 「오리엔틀」 선물가게 겸 기성복점은 1년 동안 9천「달러」의 집세를 물고 『그래도 파산은 하지 않고 끝났다』고 했다.
『처음으로 사기에 걸린 만큼 남보다 수십 배의 노력을 해서 이를 「커버」했습니다. 물건을 사들이고, 진열하고, 옷 주문을 받고 「디자인」하는 일을 모두 박 여사 혼자의 손으로 해냈다. 비싼 인건비를 쓰지 않기 위해 1년간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혼자서 일하며 꼬박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그는 그때의 습관으로 요즘도 점심은 「부티크」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먹는다고 한다.

<인건비 줄이려 혼자 손으로>
『무턱대고 물건을 팔고 옷을 만드는 일이었지만 이때 배운 것이 정말 귀중한 재산이 됐어요.』
박 여사는 처음 시작한 이 1년간의 일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내가 사업을 하려면 어떤 지식을 가져야 하는가를 완전히 알아차렸지요.』
그는 우선 첫 실패를 거울삼아 법률을 공부하기로 했다. 「캐나다」민법과 상법을 집에서 읽었다. 『이 사회는 조그만 것도 법이 좌우하기 때문에 정말 알아야 할 법률상식이 너무 많았어요.
외국인으로 그곳 사회에 적응하는 길은 무엇보다 법률을 익히는 일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박 여사는 단골 변호사를 통해 매일같이 법률상담으로 지식을 넓히는데 애썼다.
『그러나 이런 법률공부는 백 번 책으로 읽어야 소용없더군요. 실제로 한번씩 당해봐야 그 뜻을 알게됩니다.』
어느 날 박 여사는 상점에 들어온 여자손님 3명이 물건을 몰래 들고 나가는 것을 봤다. 당황하여 그는 그들을 따라나가며 『도둑이야』를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재빨리 흩어져 도망갔고 길 가던 사람들은 전혀 아는 체를 않았다. 박 여사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도둑신고를 했다. 그러나 경찰에선 증인이 없으면 도둑을 잡아도 소용이 없고 또 그런 날치기 도둑은 잡을 수도 없다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또 어느 날엔 한 손님이 옷소매 속에 값비싼 「액세서리」를 몰래 집어넣는 것을 보고 박 여사는 그 손님을 꽉 잡았다. 『물건을 내 놓으라.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하자 그 손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박 여사에게 대들었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모욕 받은 것에 오히려 항의할 기세였다.

<"도둑맞고 사업술 배운 셈">
『여기서는 이렇게 상점 안에서 분명히 도둑질을 하는 것을 봐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해요.』 그 도둑이 문밖을 완전히 나갔을 때 『가진 것을 내 놓으라』해야되고 그 옆에는 꼭 증인이 있어야 경찰의 확인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더욱이 도둑이라도 따귀를 때린다든지 팔을 꽉 잡으면 폭행에 들어간다는 것 등을 그는 『그때야 비로소 알게됐다』고 한다.
『도둑을 당했지만 사업술을 배운 셈이니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했지요.』 『비록 조그만 상점이지만 이것을 운영하다 보니 서양사회에서 시간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가를 알게 됐어요.』
박 여사는 시간을 안배하는 일이 곧 돈을 버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상점에서 좀도둑이나 시비가 벌어지면 「이것이 시간적으로 얼마나 손해인가」를 계산하면 이내 손을 들고 만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박 여사는 점점 「캐나다」인들과 접촉을 넓혀가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외국인에게 특히 동양인에게 「핸디캡」을 많이 주는가를 알게되었다. 그가 처음 돈 벌어서 치과전문의자격을 따겠다던 생각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두 번쯤 시험을 치렀어요. 번번이 시험료만 몇 백「달러」씩 없앴어요.』
30∼40명씩 외국인들이 응시해도 그 중에서 한 두 명 정도가 합격하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박 여사는 그가 애써 준비했던 「3년 계획」이 끝나고 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장사하면서 밤새워 공부해봤지만 어림없었어요. 처음 포기했을 땐 매일 밤 울고 지샜지요.』
1971년부터 그는 완전히 「패션·디자이너」겸 사업가로 방향을 바꾸어 여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다시 새로운 「부티크」를 차리고 「인·패션」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는 그때까지 옷 재단도 할 줄 몰랐으나 배우기로 했다. 「패션」전문지를 쌓아놓고 「데상」공부에서부터「스타일·디자인」 그리고 「패션」사업에 대한 경영학까지 박 여사는 하루 책 한 권씩 읽을 정도로 열을 쏟았다.

<인기 끈 우리 색동 「홈·가운」>
『단골을 튼튼히 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손님이 드나들 때마다 빠짐없이 개인기록을 해두어 통계를 잡아봤어요.』 손님들이 좋아하는 색·옷감·「디자인」 등을 그는 일일이 통계 내어 전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한 2년 지나니까 어떤 층의 여성은 어떤 옷을 입는다 하는 나대로의 일반론을 세울 수 있었어요.』
박 여사는 이 통계를 근거로 앞으로 자신이 파고 들어가야 할 층을 설정했다. 『싼 물건을 많이 소화하는 것보다 성격상 정성 들여 나대로의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그와 함께 친하게 지내던 변호사들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상류층의 여성들을 고객으로 유치하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그는 일단 이렇게 고객의 수준을 청해놓은 다음 「광고」에 뛰어들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고급잡지에 빠짐없이 간단한 「디자인」의 광고를 실었어요.』 그리고 그는 「터론토」의 상류층 주소록을 얻어 편지광고를 내기도 했다.
가장 값비싼 종이에 개인편지 「스타일」로 하여 처음 3천여 장을 부쳤다고 한다. 『서양사회에선 별로 새로운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동양인이라는데 흥미를 가졌는지 전화 문의가 많았어요.』
박 여사는 특히 동양「실크」의 야회복들을 중국·일본·한국식으로 만들어 그 자신 「모델」이 되어 입고 사진첩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우리 색동 「홈·가운」이 크게 「히트」했어요.』 비교적 강렬하지 않은 잔줄무늬 색동으로 만든 「드레스」를 가장 많이 주문 받았다고 한다. <터론토=윤호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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