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탄신 백주 특별 기고|존·무초 전 주한 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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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시 지도자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48년 한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던 이 박사는 당시의 어려운 국제 여건 아래서 한국 문제를 전 자유 세계 국가들에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했다.

<세계 속에 한국 문제 부각>
국제 여론이 한국 문제에 관심을 쏟도록 한 이 박사의 끈질긴 노력이 성공한 덕택으로 50년 6·25동란이 터졌을 때 전 자유 세계가 결속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고, 또 공산 침략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박사는 전시 지도자로서 훌륭한 자질을 발휘했다. 당시 모든 사람이 낙심해 있을 때였지만 이 박사는 의연한 자세로 한국 문제를 전 세계에 강력히 부각시켰다.
나는 한국 정부가 수립된지 이틀 후에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나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할 입장이었고, 또 그렇게 노력했다. 특히 전쟁 초기에는 이 대통령과 하루에 서너 차례씩 얼굴을 맞댔다.
동난 초기에는 자유 세계가 한국전에 참여할지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자유 세계 국가 중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했고 37개 국가에서 의료·식량 등 각종 지원을 해주는 훌륭한 조치를 취했다.
자유 세계의 한국 전쟁 참전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결하는 전후 국제 정치 질서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바로 이점에서 이 박사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특출한 자질을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대통령과 접촉한 처음 며칠 동안은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서로 충돌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박사와 나 사이에는 어쨌든 견해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박사는 당시의 국제 질서에 비 추어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50년 북한의 침략으로 전쟁이 터졌다. 자유 세계는 일치 단결하여 당시 상황에 합당한 조치를 취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박사에게 한국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도록 설득해 왔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박사나 나나 서로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줄 알았다.
당시 이 박사와 나와의 관계는 각별하게 좋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 정부의 원수이고, 나는 미국 대사라는 입장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이해는 반드시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이에 대처하는데 있어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박사완 각별했던 사이>
그러면서도 이 대통령은 일이 마음먹은 대로되지 않자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반공 포로 석방은 내가 한국을 떠난 뒤에 일어났지만 그와 같은 일들은 자주 있었다.
내가 보고 느낀 바로는 한 인간으로서의 이 박사는 천성이 강직하고 헌신적인 애국자였 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 투입한 모든 전투기·함정과 병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다.
미국이 전세계적인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는데 비해 이 박사는 으례 그들 문제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에만 주로 신경을 썼다.
「유럽」과 「아시아」 등 당시의 전 세계의 정세를 고려하면 미국이 세계의 전반적인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 당시 미국은 한국전에 전력 투구를 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은 한국을 위해서 하느라고 했다.
그때의 이 대통령과 미국 대사로서의 나와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때 이 박사는 진해에 자주 가서 바다 낚시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오 이 박사는 나와 「콜터」 장군을 바다 낚시에 초대했다. 우리 세 사람은 조그만 거룻배를 타고 낚시를 했다. 바람이 약간 불고 파도가 조금 일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박사는 헤엄을 치지 못했는데 마치 젊은 사람처럼 배 안에서 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혹시 이 박사가 균형을 잃어 바닷 속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 들었다.,

<젊은이처럼 배 안서 법석>
만약 이 대통령이 바닷 속에 빠지기라도 하는 일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미국 대사라는 자가 그를 바닷 속으로 떠밀어 넣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할 것이 아닌가? 하여간 이런 생각 때문에 그날 하오 내내 나는 고통스럽고 당혹한 시간을 보냈다. 아마 그날은 내가 한국에서 지낸 4년의 기간 중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전황은 매우 심각했고 어려웠다. 이 대통령은 전혀 신변의 위험을 개의치 않고 「워커」장군·「콜터」장군과 함께 직접 전선까지 가서 전황을 살펴보곤 했다.
이 박사는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서구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몸에 익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재자로 물러났다. 나더러 이 박사가 일을 그르쳤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나이 탓이라고 말하겠다.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이나 고 「맥아더」 원수에게 운이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나이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모두가 나이 때문에 불운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국민이 용기와 인내로써 전쟁 초기 4∼5주간을 버티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했을 것이다.

<차례>
①로버트·T·올리버 박사 (상) (중) (하)
④존·무초 전 주한 대사
⑤마크·클라크 장군
⑥매듀·리지웨이 장군 앨릭·버크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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