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비즈 칼럼

독일 통일 일등공신은 TV?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통일대박론’에 이어, 대통령 직속으로 ‘통일준비위원회’가 설치된다고 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 드리워 있던 통일 담론에 대한 장막이 걷히고, 통일이 사회적 논의의 주류로 복권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통일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는 통일이란 무엇이고, 그 과정은 어떠해야 하느냐 같은 정치적, 경제적 거대 담론이 포함될 것이다.

 통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지만, 바로 준비를 시작할 수 있는 분야가 하나 있다. 표준이다. 표준 연구자 입장에서 통일은 서로 다른 표준을 사용하던 두 사회 체계가 하나의 표준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TV를 예로 들어보자. 독일통일의 일등공신은 TV라는 말이 있다. 서독과 동독은 동일한 표준의 TV 수신방식을 사용했다. 양측 주민이 다른 쪽의 방송을 볼 수 있었고, 이것이 두 사회의 문화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이유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남북은 다른 방식으로 TV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이로 인해 잃어버린 상호 이해의 기회비용은 둘째 치고, 통일 후 어느 한쪽의 모든 방송기기와 TV 수상기를 교체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철도망의 연결도 서로 다른 궤간 길이 때문에 쉽지 않다.

 문제의 심각성은 표준이 TV, 철도망 같은 기술표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의 경영관리방식, 회계제도에서부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표준에 의해 규정된다. 이런 표준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 속에 내재화되어 있고, 이를 바꾸고자 할 때는 경제적 비용뿐만 아니라 지난한 설득과 사회통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올해부터 시행된 도로명 주소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들여 준비해 왔음에도 원래 예정된 2012년보다 2년이나 연기됐다. 지번제도(즉 ‘구’표준)에 익숙한 국민의 불만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도 2008년 무렵부터 서울 지하철에서 캠페인을 벌였지만 아직도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남북통일이 되고 한쪽 표준으로 바뀐다고 할 때 상대방이 느끼는 불편함과 열패감도 클 것이다. 교통심리학자들에 의해 잘 만들어진 동독의 교통신호등이 통일 이후 서독의 투박한 신호등으로 바뀌었을 때 동독 사람들의 좌절감이 컸다고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독일이 통일 이후 15년간 약 180조원을 표준통일에 썼다. 이는 전체 통일 비용의 10%에 육박하는 수치다.

 이런 추정에는 많은 가정과 이견이 따르지만,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남북통일에도 표준통일이 큰 장애와 비용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표준통일 준비는 통일에 관한 거대 담론과는 상관없이 바로 시작해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통일비용 감소와 사회통합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제 정치적, 추상적으로만 통일을 얘기할 때는 지났다. 남북통일을 위한 표준통일을 서두르자.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