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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제자 선우 진>|<제44화>남북협상(32)|선우 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남북협상의 북행 길에는 김일성과 옛 스승 최동오씨(l892년 생·최덕신 천도교 교 령 부친·6·25때 납북행방불명)가 20여년 만에 재회하는 화제의 꽃이 피기도 했다.
김일성은 최씨가 30대 청년시절 중국 길림성 화전 현에서 화성 의숙을 운영할 때 기숙을 하며 가르침을 받던 옛 제자.
화성 의숙은 27세 때 의주에서 기말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쫓겨 만주로 도망쳤던 최씨가 25년께 길림성으로부터 부지를 얻고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세운 교민들의 학교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나이 찬 광복군과 교민들의 자제들로 최씨가 중국말을, 고 이준식 육군소장(6·25때 육군사관학교장)이 훈도를, 일제때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한 독립투사 오동진씨가 군사학을 가르치는 등 오늘로 치면 독립군 성인교육의 공민학교 격이었다.
원래 김성주였던 김일성은 이때 17세의 나이로 공민 교에 어떻게 들 오게 돼 잠시나마 글을 익혔던 것이다.
그때 김성주는 오갈 데 없는 신세여서 같은 처지의 일부 학생들과 함께 기숙을 하며 공부를 해 최씨의 부인 최동화씨(80·경기도 용인군 용인면 금양장리 187)가 밥과 빨래를 해대는 등 뒷바라지를 해 은사 최씨 부부에겐 기억에 남는 학생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김성주는 이때 1년쯤 생활을 하다가 어디론가 가 벼렸고, 최씨 부부 또한 의숙이 3년만에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함에 따라 교민통역 겸 천도교 선교사로 전업, 서로 소식이 끊겼던 것인데 최씨가 천도교 세를 살필 겸 북행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20여 년만에 이른바 사제간의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최씨는 4월20일 우사와 함께 북행 길에 올라 21일 평양에 도착, 김두봉을 통해 김일성을 만났으며 이튿날 하오 6시 김일성이 내준 특별열차 편으로 고향인 의주로 가 친척들을 만나고 교세도 살폈다.
그때 신의주역에서 최씨를 마중했던 최씨의 사촌동생 동조씨(60·천도교 선교사·당시 천도교 청우당 평북 도당 총무부장)에 듣기로는 특별열차는 기관차에 객차 1량이 달린 것으로 최씨는 정치보위부 소속 사복 3명의 안내 속에 혼자서 타고 도착됐다고 한다.
도착 당시 역 광장엔 새끼줄을 쳐 일반의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평북도 정치보위부장(명 불상·당시 33세)과 역장이 직접마 중을 했으며 숙소도 역사 위에 있는 신의주역 호텔 2층 김일성 방에 안내되는 등 VIP대우를 했다. 이 신의주역 호텔은 일제가 지은 것으로 김일성이 묵는 그 방은 15평쯤 되고 베드· 룸이 따로 없을 뿐 호화 침대에 소파 등 장식은 모두 고급으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동조씨가 4촌형 최씨에게 듣기로는 평양에서 김일성 파 감격적인 재회를 했을 때( 장소는 불명)김은『선생님, 많이 늙으셨습니다』하며 얼굴을 알아보았으며 고향을 가보고 싶어 북행해 왔다는 말에 선뜻 특별열차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으로선 어릴 때 오갈 데 없는 자기를 거둬 준 노 은사에게 제자로서의 도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최씨는 김일성의 주선으로 기미독립운동 때 헤어지고 못 본 삼촌 관호씨(당시 66세·천도교 신의주시 교구장) 등 일가친척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하고 천도교 교리 강연도 하는 등 고향에서의 한때를 보냈다 한다.
강연은 신의주의 일제신사를 개축한 천도교교회에서 3백여 선도가 모인 가운데 했으며 내용은『보국안민 포덕 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의 인본·인권주의 교리 해설.
공산주의가 모든 것을 장악하기까지는 여타 세력과 방편 상 공동전선을 펴는 그들의 투쟁전술에 따라 당시만 해도 천도교가 용인될 때라 이같은 집회가 가능했다.
최씨가 신의주고향에 머무른 것은 3일 이 동안 그들은 신의주역 호텔 김일성 방을 계속 쓰도록 하는 등 융숭한 대접을 한편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같은 조처는 은사를 푸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일반에게 보여준 한갓 생색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일반에겐 자유행동을 허용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 놓고 내면적으로는 하오 6시까지 반드시 호텔로 돌아가 자도록 강제했으며 외출할 때도 가 있는 곳에서 호텔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소재지를 알리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혹시 고향 사람이나 천도교인 또는 천도교 청우당 사람들에게 엉뚱한 소리나 하지 않나 하고 감시의 눈길을 게으르지 않는 눈치로 공산주의의 감시 대장엔 은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었다. 최씨는 다시 동양에 돌아와서도 김두봉 등으로부터『남아서 조국통일을 위해 같이 힘쓰자』는 등의 잔류 꾀임을 받았으나 단호히 뿌리치고 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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