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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에 체육전문가단 파견, '여성 스포츠 벽' 허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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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체육지도자 40여명이 세계 최대 여대인 사우디아라비아 프린세스 노라대에 급파됐다. 여성은 스포츠 경기 관람도 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던 사우디 정부가 지난해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체육을 배울 수 있도록 허가한 데 따른 것이다. 사우디 출국을 이틀 앞둔 24일 한국외교협회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체육전문가단이 결의를 다지는 모습. [사진 국제개발전략센터]

생전 축구 경기 한번 제대로 관람해본 적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 여대생들 사이에 ‘스포츠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 체육계의 알파걸들이 급파됐다. 현지 여성들의 건강 증진이 기본적인 목표지만 아랍권의 맹주인 사우디에서 본격적인 민간 공공 외교의 첫 발을 뗀 것이다.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있는 프린세스 노라대에서 3년 동안 스포츠 교육을 맡을 우리 체육전문가단 1진 26명이 26일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한국외교협회 산하 비영리 재단법인 국제개발전략센터가 꾸린 전문가단은 총 40여명으로 이번주 중 모두 출국해 다음달부터 현지 캠퍼스에서 본격적인 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프린세스 노라대는 압둘라 사우디 국왕의 고모 노라 공주의 이름을 딴 대학으로 전교생이 6만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여대다. 1970년 설립된 사우디 최초의 여대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가 엄격히 제한된 국가다. 여성은 운전을 할 수 없고, 남녀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할 수도 없다. 버스로 이동할 때도 여성은 남녀가 타는 공간이 엄격히 분리된 차량만 탈 수 있다. 출퇴근이 힘들어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여성이 많다. 이는 체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 여성은 운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랍의 봄 영향으로 주변 지역에서 정치 개혁 움직임이 거세지고, 사우디 내부적으로는 ‘포스트 오일’ 경제발전을 고민하며 여성 정책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랍의 봄이란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아랍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反)정부 시위를 말한다. 사우디 정부는 우선 외국인들이 잠식한 노동 시장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자국민 고용 확대를 꾀하는 사우디제이션(Saudization) 정책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여성 인재풀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사우디 여성의 절반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취업하는 여성은 5분의1도 되지 않는다. 여성 고용률을 높여야 전체적인 자국민 고용률도 높아질 수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최초로 여성 선수를 출전시키고, 지난해부터 여학생들이 체육을 배울 수 있도록 허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조치다. 이번 체육전문가단 파견도 때마침 지난해 말 한국을 찾은 후다 무함마드 알아밀 프린세스 노라대 총장이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대 등을 방문해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우리 여대생들의 모습을 인상깊게 본 데서 비롯됐다. 주한 사우디 대사관이 “우리 학생들의 체력 증진과 건강을 한국 여성분들께 맡기고 싶다”는 알아밀 총장의 뜻을 국제개발전략센터 이병국 이사장에게 전하면서 일이 성사된 것이다. 이 이사장은 “이익을 내기 위한 사업 차원이 아니라, 자매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사우디 여대생들을 가르치겠단 점을 강점으로 내세웠다”고 설명했다.

선발된 체육 전문가들은 모두 국내 유수 대학에서 체육교육 등을 전공했으며, 영어에 능통하다. 대부분 여성이며, 20대 중반이 주를 이룬다. 국제개발전략센터는 공개 채용 절차를 통해 체육 전문가들을 뽑았다. 전형은 서류 심사와 심층 면접으로 구성됐고, 경쟁률은 3대1이었다. 특히 심층 면접 때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직접 근무한 적이 있는 전직 외교관들 뿐 아니라 체육계 전문가, 여성계 인사까지 심사위원단으로 참여해 어학 능력과 전문성, 인성 등을 검증했다.

체육전문가단은 사우디 여성들이 스포츠와 쌓은 벽을 허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체육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대학생들을 대상이지만 우리나라 초중등학교의 체육교과 커리큘럼 수준에서 시작할 계획이다. 또 사우디의 전통 음악 등에 맞춘 맨손체조, 즉 ‘사우디판 국민체조’도 만들어 보급할 생각이다.

정부는 이번 전문가단 파견이 청년층의 해외 취업에 새로운 활로를 뚫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공공외교의 모범 사례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부가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에 태권도 사범 등 체육 지도자 1~2명을 파견한 적은 있지만 수십명으로 구성된 팀이 가서 체계적 교육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테니스와 수영이 주력종목인 김용희(27) 트레이너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라 우리가 잘해야 이 길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에서 근무한 바 있는 서민정(33) 트레이너는 “많은 국제경기에서 업무를 봤지만 사우디 여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고가 난 것을 보고 이 일을 하면 정말 뜻깊겠다고 생각해 지원했다”며 “우리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으로, 또 국력을 인정받았기에 생긴 기회라고 생각하고 자긍심을 갖고 임하겠다”고 말했다.

70~80년대 중동건설 붐의 진원지로서 ‘아버지 세대’가 육체노동을 통해 경제 발전의 기반을 닦았던 사우디에 이제는 ‘딸 세대’가 가서 서비스 산업을 개척한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서정민 교수는 “중동에서 가장 부가가치 높은 3대 분야가 에너지, 군수, 서비스인데 그동안 우리나라는 여기에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며 “서방이 독점했던 서비스 분야의 문이 열리는 지금이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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