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왕국의 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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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에베레스트」·「마나슬루」·「다우라기리」등은 우리 귀에도 익은 고봉의 위 명들이다. 모두「네팔」왕국에 있다.
「룸비니」원은 석가의 탄생지다. 「가비라」왕국의 왕비「마야」부인이 출산을 하러 고향으로 가다가 이「룸비니」동산의 사나 쌍수 아래서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한다. 인도와 접한「네팔」의 국경 안에 있다. 전「유엔」사무총장「우·탄트」는 이 동산을 세계의 성지로 만들자는 제의를 해서 많은 공감을 샀었다. 우리나라도 이 성지 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1200여 년 전엔 혜초가 이미 이 곳을 순례를 한 일도 있다. 「네팔」은 낮선 나라만은 결코 아니다.
「네팔」의 지도를 보면 마치 누에처럼 생겼다. 주위엔「티베트」·「시킴」·「벵골」·인도·중공 등 이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와도 국교가 이루어져 지난해 가을엔 그 나라의 외상이 서울을 다녀간 일도 있다. 국토는 한반도의 3분의 2쯤. 인구는 1천2백여 만 명.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네팔」은「라나」왕조에 의해 1백여 년의 통치를 받아 왔었다. 이 나라가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46년 무렵이다. 당시 인도 유학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오랜 전제봉건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나섰다. 국민들도 넓은 세계에서 불어온 신선한 바람에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네팔 회의 당」이 조직되고 「트리부반」왕은 입헌군주국으로의 개혁을 선언했다.
1955년「트리부반」왕이 사망,「마헨드라·비르·비크람」이 왕위를 계승했다. 1959년 기어이 헌법이 제정되고 사상 처음으로 총 선을 실시했다. 그러나 1년 도 못돼「마헨드라」왕은 헌법을 정지, 각료를 체포하고 친정체제로 후퇴했다. 정치의 비능률과 낭비가 심하다는 이유였다.
인도는 이것이 못마땅했다. 「네팔」은 그런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 중공에 접근했다. 자연히 국왕의 반대파는 인도에 기울었다. 이런 혼란 속에 국왕의 자동차에 폭탄을 던지는 사태도 없지 않았다.
1962년 개정헌법이 발효했다.「기초 민주주의」라는「판차야트」의회제도가 채택된 것이다. 일종의 간선의회제.「네팔」의 재정규모는 연간 예산이 2천만「달러」(약 1백억 원)정도. 국민소득은 1인당 75「달러」선. 소득세는 없고, 관세와 토지 세 및 산림수출 수입이 중요한 세입 원이다. 문맹은 94%, 종합대학은 1개. 도로는 자동차 통행용뿐이며 그나마 중공·미국 등의 원조로 건설되었다.
이「네팔」에서 요즘 국왕 대관식이 베풀어졌다. 50여 개국에서 경축 사절이 참석했다. 우리나라는 외무장관이 행차를 했다. 산간 벽지 국과의 외교도 우리에겐 얼마나 아쉬운가를 알 수 있다.
새 국왕은 1972년에 서거한「마헨드라」왕의 장남으로 20대. 대관식이 늦어진 것은 점성가의 예언에 따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젊은 국왕은 영국 유학을 다녀온「굿·보이」라니「네팔」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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