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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물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경제기획원이 마련한 구정 물가 대책은 설탕·「메리야스」·양말 등 구정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일용품에 대해서는 업체별 생산 출하 책임제를 실시, 공급량을 증대시키고 고추·참깨·오징어 등 정부 비축분은 이를 집중 방출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밖에도 「슈퍼체인」·백화점 등을 통해 설탕·라면·비누·치약 등 생필품을 증량 특배하고, 국세청을 통해서도 부당한 가격 인상이나 영업세 인상을 구실로 한 가격 인상과 물품세 인하를 외면한 가격 인하 불이행 등을 강력히 단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의가 있을 수 없으며 또 그런대로 일부 품목에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용품의 업체별 생산 출하 책임제나 정부 비축분의 집중 방출과 대량 판매소의 공급량 증대 등은 모두 구정을 앞두고 격증할 일용품의 수요에 대처할 수 있는 공급량 증가책이 될 수 있으며 국세청을 통한 세무 사찰이 업자의 부당 이윤을 그만큼 배제할 수 있어 가격 인상 행위를 억제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 볼 때 이와 같은 물가 대책에는 그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 또한 없지 않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첫째는, 구정 물가 대책이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일용품과 생필품의 대부분이 독과점 상품 아닌, 경쟁 상품인데도 어떻게 물가 정책 당국이 각 업체별로 생산 출하의 책임제를 실시할 수 있으며, 「슈퍼체인」이나 백화점 등에 공급량의 증량 특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계획 경제나 통제경제가 아닌 이상 생산자에 대한 책임 생산 출하제란 있을 수 없고 배급 기구에 대한 증량 특배도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업체별 생산 출하제나 배급 기구에 대한 증량 특배 또는 국세청의 부당 이윤 단속을 통한 가격 인상의 억제도 공정거래 질서의 확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기는 하나 경쟁 상품이나 영세 유통 기구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임을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구정 물가 대책이 독과점품이나 경쟁품을 구분하지 않고 대량 유통 기구나 영세 유통 기구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것은 다분히 물가 인상 행위에 대한 으름장과 같은 구실밖에 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세째, 구정 물가 대책과 같은 방식으로 물가 안정이 기해지기 위해서는 정책과 행정이 시장에 깊이 개입하고 기업 활동을 강력히 통제해야 하겠는데, 이것은 물가를 시장 기능에 맡기겠다고 공언한바 있는 정책 목표와 어떤 맥락을 가진 것인지 좀처럼 납득키 곤란하다.
물론 구정 물가 대책은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물가 상승 원인이 발생할 때마다 이런 방식을 되풀이하는 날에는 시장 기능은 영원히 회복될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물가 단속을 위해 걸핏하면 세무 사찰권을 발동하겠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이냐 하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격 변동에 따라 이윤에 변동이 생기면 이에 따라 공정하게 징세하는 것이 국세청의 당연한 임무인데도 이를 물가 단속을 위한 위협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도저히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국세청이 정 궤도에서 이탈하는 일을 예사로 여기기 때문에 마침내 구정 물가 대책은 영업세 인상의 편승 인상을 인정할 수 없다 하면서도 물품 세율 인하만큼은 가격인하를 종용하는 모순을 범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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