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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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의 둘레에 성벽을 쌓은 것은 5백78년 전인 태조 5년의 일이었다. 기록에 보면 이 해에 춘추 두 차례에 걸쳐 73일간 공사가 있었다. 동원된 인력은 10만7천4백70명. 이때의 성벽은 흙담이었다.
성벽은 그후 세종3년에 석축으로 개수되었다. 이때에는 32만2천4백명이 38일간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북한산의 성벽들은 그후 2백80년이 지난 숙종37년에 비로소 생겨났다.
서울시에서는 명년 말까지 서울의 옛 내성 성곽과 문루 2개소를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금도 복원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옛 성곽은 대부분이 이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원자재가 50%이상 남아있는 문화재에 한해서만 보수를 한다. 전체의 50%를 옛 재료가 아닌 새 재료를 쓸 때에는 역사적인 가치를 잃게 된다. 그것은 꼭 「할리우드」에서 역사 영화를 위해 만든 「세트」와 별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마빈·르로이」 감독은 「영화 「쿠오·바디스」를 위해 1천만「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들여 옛 「로마」시의 일부를 「복원」했었다.
역사학자들의 엄격한 고증을 받은 그 「세트」는 옛 「로마」시대 그대로였다. 「세트」를 만드는데도 몇 달이 걸렸다.
그런 「세트」를 조금도 아낌없이 불에 태워버렸다. 영화 촬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남겨 둘 가치가 조금도 없다고 본 것이다. 미련이 있을 까닭이 없다.
지금 우리가 문화재로 여기고 있는 것 중에는 모습은 같더라도 옛것 그대로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흡사 「할리우드」의 「세트」를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새로 생길 서울의 성곽도 마찬가지다. 그런 「복원」비에 자그마치 14억원 가까운 서울 시민의 세금이 나간다고 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한 돈이라면 서민주택을 몇 채나 더 세울 수 있겠는지. 예산 부족이라는 이유로 참아 왔던 서울 시민들의 불편스러움이 또 얼마나 덜어 질 수 있겠는지.
기왕에 문화재 보호에 쓸 수 있는 14억원이 있다면 시급한 보수를 기다리고 있는 문화재들에 요긴하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재의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이다. 아무리 면밀한 고증을 하고, 조사를 거듭하고, 또 아무리 옛 재료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을 다룰 공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요새는 단청의 전문가조차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옛 사찰을 개수한답시고 갈수록 속악해지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지금은 옛 기술을 전승할 공장들의 양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좀 더 힘쓰는 게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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