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족스러운 돼지보다는 탐구하는 인간의 위치를 찾자|김형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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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게 마련이다.
역사도 그렇게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들의 역사를 하수와 강이 내버려둔다면 인간의 경향성은 우리를 불행과 파멸로 이끌어갈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에는 악이 없지만 인간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악이 개재한다는 철인들의 말이 생겼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는 오히려 높은 곳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역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말도 옳으며 민주주의는 피의 제물을 요구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며 정신은 스스로가 자기 발전을 취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들은 역사에도 목적이 있는가고 반문한다. 이것이 역사의 목적이라고 보여주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목적이 있고 정신이 스스로의 방향을 갖고 있다면 그 인간 역사에 목적이 없으란 법은 없다.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시간 속에 살면서 영원한 것을 찾으며 역사 속에서 이념을 탐구하는 자세는 버림받지 않는다.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는 것은 보다 높고 영구한 뜻을 구현해 간다는 사실과 일치되는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1975년을 맞고 있다. 이 한 해를 어떻게 살았으면 좋을까. 내버려두어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고 묻는다면 누구나 그 대답을 삼가게 된다. 자기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역사적 과정에서 비추어 본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뚜렷한 것 같기도 하다. 너무 가깝고 절박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사람은 공부를 해야하고 농사꾼은 씨를 뿌려야 하듯이 지금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바로 눈앞에 당면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크게 나누면 그것은 두 가지 사회적 과제일 것이다. 그 첫째는 무엇인가.
육체적 향락을 위한 온갖 물질주의를 지양해야한다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한 다리는 지나치게 길고 다른 한 발은 지나치게 짧은 보행을 하고 있다. 그 다리와 발을 가지고 국제 무대의 경기에 임하려 한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물질적 향락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나머지 정신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는 그 공허성을 더해가고 있다.
매커니즘이나 다량 생산과 소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있으며 그 뒤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는 누구도 생각지 않는다.
한 권의 고전도 읽지 않아 텅 빈 머리를 가진 사람일수록 고급 자가용을 굴리며 다닌다. 일부의 지도자들은 수출을 생명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때가 오면 공부하는 민족이 만든 것을 공부하지 않는 민족이 사 쓰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국가의 이념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연구할 여가도 없이 뛰어다니던 사람를이 사회 각계의 지도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층들은 환경과 조건이 허락하는대로 즐기고 노는 것이 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반공을 주장하면서도 유물 세계의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정신적 전통도 없었거니와 장래를 위해 믿는 바도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이 비참과 파국을 넘어서는 길은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 건전한 삶의 자세를 회복하는 일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돼지보다는 탐구하는 인간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을 위한 욕심을 버리고 사회 및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성서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면 사망을 초래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금욕이거나 명예욕이거나 정권욕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욕심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므로 범죄가 되고, 그 결과는 사회적 파멸이 될 뿐이다. 정신 및 사회적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를 물질과 욕망과 향악의 소용돌이로부터 구출하는 첫 단계가 된다.
둘째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역사적 삶을 영위해 감에 있어 목표가 되어야 할 뜻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수천년의 역사는 침묵 속에서도 그 뜻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라는 정신이다. 서구인들은 그것을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오늘의 정치가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그 뜻을 「홍익인간」이란 말로 표현했다.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정의 지어 보았다.
인간을 위한다는 것은 선과 사랑을 동반했을 때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가 성립되는 것은 자연 조건에 따르지만 국가가 존립하는 것은 선한 생활이 가능할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정권주의자들을 경계하는 것은 악한 방법에서도 선의 열매가 가능할 듯이 생각하며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허위성을 증오하는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적 공감이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뜻은 인격적 공존이 이루어짐이다. 그 뜻을 위하여 우리는 선한 의지와 더불어 사랑의 창조력은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의 궁극적 목적은 인격적 가치에 있으며 사회와 역사의 온갖 일들은 완성된 인격적 자아들로부터 재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질서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이 갈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사가의 태두로 불리는 「랑케」는 도덕적 활력의 충일이 역사의 기반과 목표라고 보았다. 역사는 선한 삶을 영위해 갈 때 그 뜻이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은 어떻게 창조되며 또 무슨 목표를 뜻하게 되는가. 인간에의 사랑인 것이다. 한 인문 한 인간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이 고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때 사회와 역사는 그 전도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 다리는 지나치게 길고
다른 한 발은 지나치게 짧은
보행을 하고 있다.

<필자 약력>
◇연세대 교수 (철학)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90의 2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 태생
▲일본 상지대 철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원 졸업
▲저서 『철학 개론』『철학 입문』『영원과 사랑의 대화』『이성의 피안』 『고독이라는 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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