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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 감독 이경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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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천년의 신비가 아직도 원시림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남국의 수도 「방콕」. 야자수 즐비한 강줄기를 따라 분주히 오가는 조각배 속에 조용히 담배를 빨아들이며 멀찍이 한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한 노신사가 눈길을 끈다. 5척 단구의 가냘픈 몸매에 곱게 머리를 빗어 붙인 이 신사가 바라보는 그곳엔 실습 항해 중 「방콕」의 강 부두에 기항한 우리 나라 해군 사관 학교 생도들이 3백여명의 재 태국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내리고 있었다.

<파란만장의 망향 45년>
여느 교포들처럼 젊은 생도들에게 달려가 고국 소식을 묻는다든가, 흥겨운 군악대의 주악에 휩싸이지도 않았지만 좀처럼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을 넘어 조용히 젖어들고 있는 그의 눈망울을 발견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다. 그는 매년 이 같은 장면을 되풀이라도 하듯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한바탕 떠들썩하던 고국의 패거리들이 물러가자 노신사는 이내 호주머니에서 쓰다만 원고뭉치를 꺼내들었다. 영문 수필집의 초고 같은 이 원고의 겉장엔 『이 느린 세상』 (This Slow World)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이제 칠순을 넘어선 이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길래 『이 느린 세상』을 읊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그가 끄집어내는 첫 이야기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지나가고만 50년 전의 일들이었다.
『나를 찾아온 운규는 영화 「보·제스트」의 남 주인공 흉내를 내며 배우를 시켜 달라고 길길이 뛰었죠. 침까지 튀기며 열기를 뿜는 운규의 모습은 꼭 폭발직전의 화산 같았어요. 한마디 할 때마다 씩씩거리는 호흡이 마치 무슨 협박이나 하는 듯 했고 변덕스럽고 흉측하게 생긴 모습은 꼭 몇 천년 전 「아라비아」의 정치 음모에서 처형 당한 정치범 같습디다. 그래도 나는 자꾸 그를 좋아했어요-.』
『망향 45년의 서두를 이렇게 꺼내는 노신사가 바로 우리 나라 무성 영화 시대의 명감독이자 영화 『장한몽』 (이수일과 심순애)으로 일제하 한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이경손씨 (70·「P.O.Box11∼1001, Bangkok 11Thailand)다. 45년의 세월로 고국의 후세들이게는 이미 잊혀져 가고 있는 인물이지만 우리 나라 초창기의 영화계를 알고 있는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예술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때 소설가로 명성 떨쳐>
약관 19세로 영화계에 투신,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인회 회장이었고 나운규·전창근·윤봉춘 등을 키워냈으며 장편 『백의인』을 조선일보에 연재, 소설가로도 한때 명망을 떨쳤던 이경손씨. 그랬던 그가 단순히 「식민지하 망국의 예술인」 신세가 싫어 임시 정부가 있던 상해로 떠나 다시는 고국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유랑의 길을 나선 것은 1929년 늦은 가을이었다.
기구했던 한국의 근대사를 방불케 할만큼 파란만장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내력은 바로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 중 한편의 줄거리만큼이나 복잡하고 극적이다.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는 격으로 20년대 서울 바닥에는 예술가도 많았었죠. 그때의 서울이래야 인구 20만명 정도로 장충단 뒷산에 올라보면 집 한 채 없는 산골이었고 서대문 밖에는 수수밭, 그리고 동대문 밖에도 구멍가게 몇개만 지나면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아카시아」 숲 속을 누볐었어요. 전문학교가 두세개, 방직 공장이 하나쯤, 자가용차라고는 구경할 수 없었고 다만 어느 돈 많은 청년이 자기가 가진 「모터·사이클」을 자랑하고 싶어 영화 자금을 대고 주연으로 나온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역시 그가 말하는 우리 나라 영화의 초창기란 그 때의 서울 풍경만큼이나 멀고 향수에 젖은 것들이다. 그리고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예술과 사랑과, 그리고 망명에 얽힌 이야기들은 지금 태국의 실업인으로 정착한 그의 생활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먼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그는 l904년 전형적인 서울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왕실전의로 일해온 그의 가문은 종이품의 귀족으로서 그는 2형제 중 둘째였다. 일시 낙향한 부모님을 따라 경기도 연천에서 적성 보통 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제일고보 (경기중)에 입학했다. 그가 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 간간 발표한 시·수필 등이 학생 잡지에 실리면서 그의 문재는 차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명의되라는 양친 당부 거역>
비오는 날이면 하인의 등에 업혀 등교하면서까지 닥치는대로 문학 작품을 섭렵했다. 「체홉」·「투르게니에프」 등 주로 심각한 내용의 러시아 작품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문학에 대한 집념, 새로운 경험에의 동경,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심 등이 양반집 도련님으로서 평탄한 학창 생활을 하는 그를 만족시킬리 만무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명의가 되라는 부모님의 희망에 도저히 순응할 수 없음을 느낀 그는 3학년 때 가출, 인천 상선 학교로 적을 옮겼다. 그의 방랑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비록 자신의 가문보다는 낮은 출신들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지만 신기하기 만한 선체의 구조를 배우고 이따금 실습 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저어가며 철학과 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재미는 제일고보의 생활과는 비길 수 없는 흥미와 보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는 영원한 「보히미언」만이 자신의 갈 길이라고 생각, 마도로스가 되어 바다와 벗해서 일평생 살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결심도 일순간, 그의 인생 항로를 또다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3등 항해사 시험을 1주일 앞두고 3·1운동 (19l9)이 터졌다. 감수성 강한 청소년에게 「조선 독립」을 외치는 동포의 외침은 다룬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충동이었다.

<방콕=전육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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