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의 역사적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975년의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이해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오늘로써 막을 연 1975년은 우리에게 있어 특이한 의미를 가진 해라는 것을 우선 주목해야할 것 같다.
첫째로 이 해는 겨레가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광복을 찾은지 만 30년, 그리고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영원토록 변할 수 없는 국기로 하여 신생 민주 공화국을 세운지 만 27년째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 해는 1961년 5·16의 군사 혁명에 의해 현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집권 세력이 등장한지 만 14년, 그러니까 이들이 해방 후 우리 역사의 절반 이상을 이끌어 온 기록을 세우게된 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시각을 돌려 최근의 세계 동향과 견주어 본다면 올해 1975년은 이른바 미래 시대의 2차 연도에 해당한다. 우리도 「과거 시대」의 물량적 풍요의 신화를 버리고, 총체적 자원부족 시대를 살아가면서 전 인류와 함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창출에 참여해야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해방 후 30년>
해방 후 30년, 그리고 집권 후 14년이라 하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만한 시간의 집적이 있었다면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나 한 국가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나, 실로 「격세」의 감이 있는 뜻 있는 변화가 있었어야 마땅하다. 시간의 흐름이 비교적 원만했던 고전적 시간의 척도에 의해서도 그렇거늘, 하물며 과거의 1백년을 불과 그 10분의 1미만의「타임·스팬」안에 뛰어 넘어야할 현대사적 시간의 척도에 의해서랴.
그런데 1975년 우리의 정치·경제·문화 행태와 우리 사회 일반의 정신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이 짧지 않은 시간을 경과하면서 우리 사회에 서상한 뜻 있는 변화를 이룩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8·15 해방의 이념이자, 그 제도적 표현이라 할 민주주의는 과연 이 땅에 뿌리를 박고, 난숙한 열매를 맺게 되었는가. 증가된 물량과 확대된 경제 규모만큼 국민의 후생 복지도 증대되어 모든 국민이 적어도 사람다운 생활의 보장을 받고 있는가. 이 나라의 젊고 유위한 지식인·예술인들은 과연 마음놓고 창조적 문화 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또 그럼으로써 세계평화와 인류 문화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살리고 있는 것인가.
불행히도 1975년 벽두에 선 이 시점에서 이 모든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한마디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해방 이후 이 나라를 이끌어온 역대 위정자와 모든 지도층 인사들이 져야 할 것이다.

<역사적 책임감>
물론 그 동안 우리의 외형적인 국력이 괄목할 만큼 신장했음을 부인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 우리는 전 국토를 거의 폐허화하다시피 한 6·25 동란을 겪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도발을 받아왔던 것이며, 여기에 겹쳐 객관적 국제 정세의 제약마저 가중되었었다는 점등 해방 후 우리 역사의 획기적인 발전을 저해해온 요인들이 많았음을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속적인 빠른 「템포」로 흐르는 현대사적 시간 속에서 30년 또는 14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나라를 영도해온 사람들에게 있어 지난날의 역사적 정체에 대한 책임이 모면될 길은 없다. 역사는 오직 1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지나간 역사에 대한 책임 회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 의식이나 올바른 발전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실로 뼈아픈 반성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유·정의·진리 등 인류사회 전체의 가장 원초적인 개념들조차가 서로 전혀 다른 2중의 뜻으로 통용되는 비리가 예사처럼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양두를 걸어놓고 구육을 팔던 고사나 백마비마 따위의 궤변이 성행하던 시대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이같은 세태 하에서는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이 조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정의·진리>
1975년, 우리는 이 불신 풍조의 근원을 찾아내서 이를 단호히 불식하고, 우리 사회에 진리와 신의의 빛을 소생시켜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뮈르달」 교수는 모든 후진국의 통폐로서, 당연히 책임질 일에 대한 책임 회피, 자명한 개념이나 원리 원칙적인 사상에 대한 궤변의 성행, 법의 있으나 마나한 상태의 만연 등을 들고, 이것이 곧 이들 나라의 참다운 발전을 저해하는 「소프트·스테이트」 (연골 국가)화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다시 말하여 지도층의 책임 관념 희박, 자명한 진리에 대한 견강부회적 억지 주장, 법의 지배의 유명 무실화 등이 국가의 기강을 연골 동물처럼 흐늘흐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경고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75년 우리의 살 길과 해야할 일들은 분명하다. 국민 모두가 저마다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유·정의·진리 등 자명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현대 생활 속에 실현시킴으로써 이미 우리 사회의 폐부에까지 파고 든 도도한 불신의 풍조를 불식해야할 것이며, 이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매몰되어 가는 인간 가치의 우위를 회복시키는 일에 있는 힘을 총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세계 경제의 구조적인 불안 속에서 적은 자원으로 깨끗하고 복된 생활 환경을 새로 건설해야 할 「미래 시대」의 2차년도, 즉 1975년 세계의 과제이자 또한 한국민의 과제인 것이다.
그 길은 멀고 험난할 수도 있겠지만 희망을 갖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는 것이다. 희망과 신념·용기야말로 인간의 생명 구조의 핵심임을 통찰한다면 해방 후 이미 30년의 역사적 시련 속에서 살아온 한국민에게 더군다나 절망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1975년 우리는 이 희망을 갖기 위해 사람마다 깨끗한 마음, 불굴의 신념과 용기, 그리고 저마다의 지혜를 합쳐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