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북의 한상 이성사씨(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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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49년1월 중국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하자 뒤를 이어 이씨가 몸담고 있던 해군정보처도 대만으로 옮겨 고웅에 자리잡았다.
이씨는 대만에 온 뒤에도 계속 중국군대에 머물러 있었으며 50년에는 중위로 진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된 조국이 있는데 중국국적을 가진 채 중국군인 노릇을 계속하는데 회의가 생겼다.

<김홍일씨 호의로 군에서 전역>
또 군대생활을 계속해 보았자 발전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씨는 51년 중국군 당국에 전역을 신청했다. 전역을 희망하는 이유로 그는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중국군 당국은 이씨의 신청을 즉각 기각했다.
이유는 첫째, 이씨가 정보관계 기관에 다년간 근무했다는 것과 둘째, 이씨의 한국적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군복을 벗고 국적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이씨는 군 당국의 설득을 뿌리치고 당시의 주 중국대사 김홍일씨를 찾아갔다.
자신도 중국군대에 몸담고 있다가 해방과 동시에 귀국, 대사직을 맡고 있던 김홍일씨는 이씨를 돕기 위해 적극 나섰다. 개인적으로 아는 중국 내무부장에게 실정을 알리고 대사관의 공문으로 한국적을 확인, 전역시키라는 양해를 얻었다.
결국 이듬해인 52년 이씨는 군에서 제대했다. 그도 이미 32세가 됐다.
제대한 이씨는 김 대사의 호의로 우선 대사관 임시직원으로 1년간 근무했다.
대사관을 그만둔 이씨는 그때 대만에 손길을 뻗쳤던 한국의 H산업과 손을 잡기로 하고 한국산 사과를 수입하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 중국은 사과와 같은 특수품목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다만 투자유치를 위해 해외 화교로서 대만에 투자하는 사람에게는 투자액의 5%범위 안에서 금지품목의 수입도 허용했다. 따라서 한국산 사과를 수입하려면 이러한 특혜 「달러」를 사들여야 했는데 용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사과수입의 이익도 컸다.
한편 한국도 이익이 큰 「바나나」수입을 사과수출과 「링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사과의 대만수출을 열망하고 있었으나 이런 애로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실패했다.
이씨는 우선 사과수입을 희망하는 대만 상인들로부터 그들이 갖고 있는 특혜 「달러」를 모았다.
군의 경력, 한국대사관에 근무한 이점 등 그는 갖고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6만「달러」를 확보, 54년2월 난생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22년만에 서울서 여동생 만나>
한국에서 사과를 매입하고 「바나나」수출의 계약금을 받는 일 등은 H산업이 맡아주었다.
이해 3월 상자 당 2「달러」씩 3만「달러」어치를 선적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서 1상자에 2「달러」씩 산 사과는 대만서 5배인 10「달러」에 팔 수 있었다.
이 첫 사과거래의 성공이 이씨의 오늘을 만든 기반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10만「달러」상당의 사과를 사갔고 같은 양의 「바나나」를 한국에 팔았다.
이로부터 이씨의 무역회사 통성행은 한·중 무역의 상징처럼 됐으며 이씨의 사업은 순풍에 돛 단것처럼 성장했다.
이때까지 총각이던 이씨는 36세 때 친구인 장석구씨의 중매로 서울 살던 장옥성씨(당시 24세)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대북 열빈루에서 김홍일 대사의 주례로 올렸다.
이씨 슬하에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경선·16)과 중학 1년짜리 큰아들 정민(13), 국민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 중기(8)가 있다.
서울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씨는 화순에 남기고 온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여러 차례 신문에 광고를 했다.
이씨의 둘째 여동생 종실씨는 해방 후 남편을 따라 월남,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씨의 신문광고로 22년만에 해후하게 된 것.
지금 이씨의 본적은 동생이 살고있는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으로 되어있다.
무역으로 계속 신장해온 이 씨의 사업은 65년부터 경쟁이 심해지고 특히 한국과 대만의 경제발으로 상호 특화산업이 없어지면서부터 별 재미를 못보게 되었다.

<경쟁 심해 전업…인화지 생산>
이 씨가 계속 맡아온 사과수입을 71년부터 대만정부가 경영하는 중앙신탁국에서 직접 맡게 된데다 한국 내의 업자들도 청과물수출협의회를 만들어 중국인과 직접 거래를 함으로써 이 씨는 여기서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예측한 이씨가 68년 새로 착수한 것이 인화지공장. 그러나 이 공장도 오늘처럼 본궤도에 오르기까지에는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인화지 생산에서 생명이 되는 것은 감도가 적정한 제품을 뽑아내는 기술인데 그동안 3∼4차례나 실패를 거듭했다. 72년 처음 제품생산에 성공은 했으나 이때의 기술자 김규웅씨(가명·36)는 어찌된 셈인지 중국인 종업원과 짜고 제품 3만「달러」어치를 내다 팔아먹고 한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지금도 그때 유출된 제품이 일부 나돌고 있어 지장을 받는다는 것.
이성사씨의 방랑은 대만에서 일단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남은 소망은 대만에서 무엇인가 이룩하여 그것을 들고 고국에 돌아와 묻히는 것이라 했다. 【대북=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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