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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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떤 공개학술강좌에서 조선왕조 초기의 언론제도에 관한 연구발표가 있었다. 이성계가 신 왕조를 창건한 후, 제9대 성종에 이르는 역대 군왕의 언론정책과 언관의 활동상황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다.
이 약 1백년간을 대개는 왕권의 확립과정으로 잡는다. 태종대까지에 걸쳐 전왕조의 잔재를 청산하고 세종의 황금시대를 거쳐 성종 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을 반포하니 이로써 조선왕조 5백년의 모든 제도가 고정된다. 그동안에 있었던 대사건이란 모두 왕위의 계승을 둘러싼 유혈극이다. 흔히 「왕자의 난」이라 부르는 태조의 이복·동복형제 간에 있었던 쟁투, 수양대군(뒤의 세조)의 「쿠데타」 등은 그 두드러진 예다.
따라서 군왕의 언론강압은 대체로 우심한 편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언관의 비판도 굽힐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거친 군왕일수록 직간을 싫어했지만, 언관이란 『군왕에게 잘못이 있으면 용린을 비판하고, 뇌정에 항거하여 중벌도 불사한다』는 기개를 잃지 않고 항상 군왕에 대한 극간을 본령으로 삼았다.
유교의 지도이념으로 보면 모든 행동의 규범은 충효에 있다. 그러나 충의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무조건 복종만은 아니다. 폭군은 이미 군왕이 아니라는 사상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것을 유교의 혁명사상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그러기에 소위 「반정」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당시의 언관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그들은 국가와 천하를 반드시 동일시 하지만은 않았다. 나라가 망하면 다시 세울 수 있으나,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바로잡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선비가 져야 한다고 여겼다. 국가관보다는 세계관이 뚜렷했다고나 할까.
전제왕조 하에서의 군왕의 권력이란 막강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법으로 보장된 상당한 제동장치가 있었다. 모든 입법에는 「서경」이라는 인준의 절차가 있어 비록 왕의 윤가가 있은 뒤에도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반대하는 한 효력을 발생치 못하였다. 이러한 절차는 관료의 인사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남에게 비판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사상 명군으로 알려진 이들도 기록을 잘 살펴보면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심기가 사나울지언정 그것이 약이 된다는 이성만은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연산군을 제외한 어떤 군왕도 눈의 가시 같던 언관이지만 이를 없앨 생각은 감히 못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언관이 자신에게 이로운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다.
부단한 외적의 침입 속에서 조선왕조는 5백여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견디어 왔다. 이를 군왕의 지혜와 언관의 식견에 돌려보는 눈도 있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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