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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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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치훈이를 동경한국학원 초등부 1학년에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지금까지 살고있었던 하숙집에서 학교 근처로 조그마한 「아파트」를 빌어서 옮겼다.
이날부터 아침에는 어머니 대신 밥을 끓여 먹여야 했고, 아버지 대신 학교에 데려다 주어야 하는가 하면 수업이 끝나면 다시 목곡 도장에 가서 바둑을 가르쳐야 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일본기원에 나가 원생(도일 직후 원생 9급을 인정받음)으로서 대국을 가져야 하는 등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생활이 시작됐다. 최초의 목표인 최연소 입단을 향해서 나는 6세의 철부지 동생과 하루를 꼬박 같이해야 했다. 그때 내 나이는 20세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동생보다 겨우 4개월 빠른 것뿐이었고 그런 형이 동생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난의 하루하루를 이겨나가야 했다.
치훈이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일본말도 좀 능숙해지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 처리하기 때문에 나는 좀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학교(명치학원대학)와 바둑수업에 정진할 수가 있었다.
치훈이가 처음 왔을 때 목곡 선생을 위시해서 유명한 선생들은 10세까지는 초단을 따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결국 10세 때에 입단「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활환경의 급변과 언어의 부자유, 경제난 등이 10세를 11세 입단으로 늦추게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 몇 년 동안 이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고 견디어왔는가.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l968년2월 어느 날, 일본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입단대회 본도의 17명 「리그·멤버」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긴장된 최후의 시합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치훈이가 이기면 1승 4패로 입단이 결정되기 때문에 한국신문 특파원들도 쫓아오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전자들 모두가 숨소리를 죽여갔다. 이날 치훈이의 상대는 「아즈마」(동도언)군이었다.
밤늦게 드디어 2호 반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치훈이가 승리함으로써 세계최연소 입단의 신기록이 세워졌다.
내일부터 치훈이는 이제 전문기사로서 명인을 목표로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시합이 끝난 후 치훈이와 둘이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눈물만을 본 채 그 이상의 아무 말도 못했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가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싸워온 형제끼리 말이 필요했을까?
다만 고국에서 부처님께 기도 드리고 계실 부모님께 빨리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었다.
별항의 기보는 바로 그 순간의 열전보다. 이 바둑을 지금 돌이켜보면 유치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의 기보와 대조해 보면서 치훈이가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치훈이의 입단기록은 일본기원 동경지부에서 초단을 받은 임해봉 9단보다 l년, 일본기원 동경본부의 기록으로는 2년을 단축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치훈이는 이때부터 한번 세운 최연소기록을 계속 세워나가기에 쫓기고 쫓아야 되는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단란한 한때를 가져볼 수 있을지. 아니, 우리 승부사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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