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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북의 한상 이성사씨(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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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들을 떠나 보내는 이씨의 부친은 5백원을 꾸려 주었으나 이씨는 이것을 사양하고 20원만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이씨가 집을 나올 때 이씨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 틀림없이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후 이씨는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밥 많이 먹는다고 잔소리 듣고>
지금도 올해 82세 되는 부친이나 동생들이 현지에 살고 있을 것으로 그는 믿고 있다.(다만 여동생 종실씨만 서울 불광동에 살고있는 것을 62년 신문광고를 통해 찾아 상봉했다.)
집을 나선 이씨가 찾아갈 곳은 그나마 길림밖에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축구로 이름을 날렸던 이씨는 모교인 제4고등학교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다.
마침 학교 부근에 있는 한국인 대서소에서 서기를 구하던 참이어서 이씨는 선생의 소개로 그 대서소에 취직이 됐다.
여기서 이씨는 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아침 9시가 근무시간이지만 7시면 사무실에 나와 소제를 하고 유리창을 닦는 등 사환이 할 일까지 모두 했다.
봉급은 주인집에서 먹고 자고 한 달에 20원씩 받기로 했는데 돈을 절약하기 위해 세탁도 직접 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니 과거의 잡념도 없어지고 새로운 인생을 배우는 것 같았다.
열심히 노동을 하면서부터 밥맛도 다시 생겨 주인집에서 주는 한그릇으로는 모자라기가 일쑤였는데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밥을 많이 먹는다는 잔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서소 일은 이씨 혼자 꾸려나가는데 봉급이라고 겨우 20원을 주면서 밥 먹는 것조차 잔소리를 듣게되자 이씨는 대서소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대서소에서 일한지 3개월만이었다. 이씨가 대서소를 자신 있게 뛰쳐나온 것은 그런대로 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서소에서 일할 때 신의주에서 공장을 경영한다는 사람이 길림에 땅을 사러 온 일이 있었는데 그는 이씨의 손을 빌어 토지매매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는 이씨의 성실하고 치밀한 태도에 반했다며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해왔다.
이씨는 대서소를 그만두고 신의주로 김씨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만주와 한반도가 같이 일제의 치하에 있었고 왕래도 자유로왔기 때문에 따로 고국을 찾는다는 감회는 없었다.
김씨가 경영한다는 공장은 운동화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직공이 10여명밖에 안되는 소규모였다. 그리고 직공들은 모두 중국인을 쓰고 있었는데 무식하고 더러웠다.
여기서 이씨는 경리 일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분위기는 썩 마음에 안들었지만 달리 갈데도 없었을 뿐 아니라 김씨의 호의를 저버릴 수도 없어 그는 열심히 일했다.
장부정리조차 제대로 안 돼있던 것을 이씨는 20일만에 말끔히 정리하고 중국인 직공들에게 밤마다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주인 김씨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고 회사 내부의 일은 이씨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곳이 몸바쳐 일할 곳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발전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1개월만에 이씨는 길림학교 시절의 은사며 같은 한국인으로 당시에는 중국 한구에서 광산을 하고있던 이복현씨(82·귀국 후 원광대교수 역임·현 서울거주)에게 편지를 띄워 취직을 부탁했다.
물론 주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일도 계속 열심히 했다. 봉급은 따로 정하지 않았고 필요한 돈은 타서 썼다. 신의주에 있는 동안 그는 틈을 내어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평남 안주의 고향을 찾아갔다.

<한구에 일자리 있다고 초청장>
그의 친척들은 모두 만주 화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하지만 찾아볼 사람 하나 없었다.
이씨가 처음 찾은 고향은 올망졸망한 산들에 둘러싸여 초라한 오막살이가 20여채 모여있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만주대륙에서 자라 이곳 저곳 도회를 전전한 그에게 이런 마을풍경은 한없이 초라한 것이었으나 이곳이 내가 태어난 땅이라는 감회에 젖어 그는 소리없는 눈물을 삼켰다.
한구의 광산주 이복현씨로부터 일자리가 있으니 오라는 초청장이 온 것은 취직부탁 편지를 띄운지 2개월이 지난 1940년 여름이었다.
당시 내외정세는 2차대전으로 한발 들여놓은 때여서 구주에서는 영국·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1939)하고 「아시아」서는 일본이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의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다시 프랑스령「인도차이나」에 대한 공략을 개시할 즈음이었다.

<거액 주고 만류…끝내 뿌리쳐>
이씨가 이제까지 일하던 공장을 떠날 뜻을 밝히자 주인 김씨는 깜짝 놀라 적극 만류했다.
수입의 1할을 주고 공장운영을 맡기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부풀어 있는 약관의 청년을 얼마 안되는 돈으로 붙들어 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씨는 주인 김씨의 줄기찬 권유를 뿌리치고 급료조로 1백원을 받아 상해로 떠났다.
당시 한구로 가려면 상해를 거쳐 양자강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정「코스」였다.
뿐만 아니라 상해에는 화전소학교를 같이 다닌 어릴 때 친구 김창식씨(현재 54세·대만 성부인화지공장 품질관리과장)가 있었기 때문에 꼭 들르고 싶었다.
김창식씨는 화전소학교를 이씨보다 1년 먼저 졸업하고 길전에서 농업학교를 나온 뒤 바로 중국대륙으로 건너와 그때는 상해에 있는 일본동영영화사의 현상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신의주를 떠난 이씨는 봉천을 거쳐 대련에서 배를 탔다.
3천t급 기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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