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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그때도 거들 셈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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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하느님. 전쟁이 4주 정도 단기로 끝날 경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올라가고, 동아시아 지역에도 0.2%포인트 정도 고물이 떨어진답니다. 이라크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 직후 이라크 공포증(Iraqaphobia)에서의 해방감 때문인지 미국 증시의 다우지수는 3.7% 오르고, 한국의 주가도 4.2%나 뛰었습니다.

"성장률이 높아지고 주가가 오른다니 아주 살판났구나."

*** 이라크 공포증 벗자 株價 뛰어

-사람이 강냉이 튀밥처럼 죽어 자빠지는 마당에 살판이라니요. 전선의 병사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자식 잃은 부모는 어찌하며, 남편 잃은 과부와 아버지 잃은 아이들은 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라크 국민이 후세인 대통령의 인질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같습니다. 더구나 전쟁이 3개월 이상 장기로 계속되고 유정(油井)이 파괴될 경우 미국과 동아시아의 성장률은 각기 4.5%포인트와 3.7%포인트나 폭락한다는데요. 단기전 기대는 결국 최첨단 병기와 가공할 화력으로 초반에 왕창 죽이고 엄청 부숴서 석유를 '구하자는' 얘기 아닙니까?

"그게 어디 내가 시킨 것이냐? 너희가 저지르려는 일이지."

-부시는 회개한 탕아를 자처합니다. 후세인은 회개하지 않는 악이고, 그 악을 징벌하는 전쟁은 정의롭다고 생각한답니다. 바티칸은 이 전쟁이 하느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성명서를 돌리고, 아랍 국가들도 신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길길이 뜁니다.

"나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지, 미운 이웃 머리 위에 폭탄 떨어뜨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부시가 믿는 하느님은 따로 있는 모양인데, 그의 주민등록은 어느 하느님 앞으로 되어 있다더냐?"

-석유가 죄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 '검은 황금'을 세계에 고루 묻어놓으셨던들 '피와 석유의 교환' 따위의 험한 언사가 오가지 않았을 텐데요. 석유 수입 의존도가 52%나 되는 미국은 매장량 세계 2위의 이라크가 자꾸 삐딱하게 나가니 한번 더 본때를 보이고 군기를 잡고 싶었겠지요. 최후통첩만으로 유가가 2% 정도 떨어졌다니 작전의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들으셨지요? 대량살상무기 개발 위험을 똑같이 탓하면서 북한은 놔두고 이라크만 치려는 것은 북한에는 석유와 이스라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의 불평 말입니다.

"터질 때 터지더라도 석유 한번 맘껏 써보는 것이 북한의 소원일지 몰라. 세속의 주문대로 바빌론에 석유를 묻었으면 가나안에도 묻었어야 하는데…. 너희는 주5일 근무하지만, 나는 천지 창조에 엿새나 걸렸다. 쫓기다 보니 미진한 점이 있었구나."

-전에는 전쟁을 하고 싶으면 유엔 안보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15개 안보리 이사국 중에 11국이 반대하고, 돈으로 표를 사려던 추악한 외교조차 끗발이 다하자 미국은 유엔 결의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라는 막가파 배짱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제 '예방 전쟁' 명분만 앞세우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두들겨 패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남의 걱정하게 생겼느냐? 너희 나라도 공병과 의무 부대를 파견할 예정이라면서? 미국과의 관계로 보아 거절하기 어려웠겠지만 살필 대목이 여럿이야. 전쟁이 끝나고도 중동 석유는 계속 써야할 테지. 그리고 혹시 한반도가 병화에 휩쓸려 너희가 지금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너희와 한 치 원한도 없는 나라의 군대가 너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면 어쩌겠느냐? 이라크를 잿더미로 만드는 폭탄이 강대국 '힘의 정치' 산물로서 너희가 거들 수밖에 없다면,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 폭탄도 힘의 정치 산물이니 그때도 거들 셈이냐?"

*** '예방 전쟁' 명분만 앞세우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하느님 체통도 있고 시정의 요사한 유언비어를 믿으시는 겁니까?

"이제 막 하자는 것이냐? 후세인이 떠나도 미군은 이라크로 진격하겠다는 소식 못들었느냐? 석유와 이스라엘이 없어도 치고 싶으면 치는 거야. 악의 싹을 자르는 성전보다 더한 구실이 어디 있겠느냐."

-아이고 하느님.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굳세어라 후세인아'만 외칠까요, 폭탄이 분계선 저쪽으로만 떨어지도록 기도를 드릴까요?

"전쟁 나서 죽으나 전쟁 막으려다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 아니겠느냐?"

-예?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