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제자 김태선>|<제41화>국립 경찰 창설(38)|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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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백천 경찰서 피습>
38선 일대에서 도발을 일삼아오던 북괴는 49년2월2일 서부 38선 지역의 백천 경찰서를 습격, 불사르고 경찰관 9명을 학살한 뒤 달아났다.
백천에는 원래 경찰서가 따로 없고 연안 경찰서 관할 지역이었으나 정부 수립 후 38선 경비 때문에 따로 경찰서를 신설하게 됐다.
새로 생긴 백천 경찰서는 일제 때 백천 온천 「호텔」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경찰서 건물 가운데는 가장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다.
「호텔」을 그대로 쓴 탓으로 방이 많아 경위급인 주임들도 독방을 썼을 뿐만 아니라 방마다 「코피·세트」와 「소파」까지 갖추어져 있어 경찰관들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 겨울에는 온천의 더운물을 끌어들여 연료비를 들이지 않고도 방마다 「스팀」 난방을 했으며 유치장에까지 「스팀」장치가 돼 있었다. 북괴 측은 49년 초부터 경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오다 그해 1월25일에는 청단군 내성면을 침공, 경찰관 2명을 사살하는 등 서부 38선 지역에 대해 집중 도발을 일삼기 시작했다. 백천 경찰서 피습 사건은 청단 사건이 있은 지 약 1주일 뒤에 일어났다.
그해 2월2일. 이날은 신성모 내무부장관이 38선 일대 경찰관서를 시찰하는 도중 백천에 들렀다 떠난 날이었다. 이 때문에 백천 경찰서는 평소와 달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었지만 하오 8시쯤 인근 양청 경찰대로부터 긴급 응원 요청이 있어 경찰관 20명을 파견했었다.
당시 38선 지역의 경찰관서 끼리는 북괴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인근 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고 또 응원 요청을 받으면 즉각 달러가 응원하는 공조체제가 철저히 확립돼 있었다.
양청으로 지원 갔던 응원대는 작전을 끝내고 그날 밤 10시30분쯤 백천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이 도착한지 약 30분쯤 지났을 때 또 다시 일단의 경찰관들이 대열을 지어 경찰서 정문으로 행진해왔다.
이들은 경찰을 위장한 북괴군이었지만 입초 섰던 순경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양청으로부터 잔류 부대가 돌아오는 줄만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북괴군들은 우리 경찰관 정복을 입고 앞장선 지휘자는 경사 계급장까지 달고 있었다.,
지휘자는 정문에 이르자 입초 순경에게 『수고합니다』라고 말했다. 입초 순경은 순간적으로 「핫」하고 대답한 뒤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들은 곧장 불이 켜져 있던 숙직실로 들어가 총을 난사한 뒤 사무실마다 수류탄을 던져 순경 3명과 여 사환 1명을 사살하고 입초 순경을 쏘아 쓰러뜨렸다.
경찰서를 점령한 북괴군은 보초까지 세우고「사이렌」을 울렸다.
집으로 돌아갔던 경찰관들이 비상 소집인 줄 알고 뛰어오자 어둠 속에 숨어서 차례로 쏘아 쓰러뜨렸다.
때마침「사이렌」소리를 듣고 달려갔던 수사 주임은 『누구요』하는 입초의 물음에 『수사 주임…』하고 미쳐 대답도 끝내기 전에 북괴군이 쏜 총에 맞아 절명했다.
북괴군들은 마침내 경찰서 건물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유유히 퇴거했다. 이들이 방화하고 물러가기까지는 불과 45분간이란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2층 교환실에서 밤늦게까지 근무하고 있던 교환양 송모양은 처음 총소리를 들었을 때는 오발인 줄 알았지만 폭음이 계속되자 공비의 습격인 줄 알아차리고 연안 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했다.
송양은 계속 교환실에서 버티려했으나 불길이 번지자 물받이 「파이프」를 타고 내려와 목숨을 구했다.
안양의 지원 요청을 받은 연안 경찰서는 경찰 증원 부대를 즉각 출동시켰다.
북괴군은 도중에 숨었다가 『너희들은 백천으로 가면 모조리 죽일테니 알아서 행동하라』 고 「스피커」를 통해 출동하는 증원 부대에 협박까지 했다.
증원 부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괴군은 모두 퇴거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났던 경찰서는 잿더미가 된 뒤였다.
이때 유치장에 수감됐던 피의자 2명도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소사하고 말았다.
당시 국회 외무·국방 위원회는 최윤동 의원과 장병만 의원을 현지에 파견, 사건 경위를 조사, 국회에까지 보고했다.
이 조사 결과 사건 당시 백천 경찰서를 경비했던 경찰관은 모두 30여명이었으나 거의 2주간 안팎의 훈련 밖에 못 받은 신참들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이 사건은 전적으로 경찰 경비의 소홀 때문에 큰 피해를 보게 했다고 지적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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