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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김재원<철박·초대국립박물관장·학술원 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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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작년 한해는 경주고분 발굴의 해라고 할만큼 신문지상에 매일같이 신발견의 기사가 실리고 고고학이나 고물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발굴된 새 유물의 역사학 상·미술학 상의 의의에 대하여 한마디씩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침 그 얼마 전에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전무후무한 찬란한 유물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의 일로서 일반독자로 하여금 우리 나라는 땅을 파면 금·은·보패가 쏟아지는 것 같은 인상을 가지게 하는 듯 하였다.
그후 경주 155호 분의 발굴이 끝난 후 문화재관리국직원들은 또다시 98호 고분을 파기 시작하여 그 작업이 거의 끝난 모양인데 이 고분은 155호보다도 더 규모가 큰 것으로 전문하는바에 의하면 제거해야 될 토량이 155호의 수배에 이르고 이에 소요되는 예산도 발굴과 원형복구까지 수천 만원 또는 억원 대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고고학 발굴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국립박물관에서는 155호 분을 포함한 경주지구의 신발견 유물전시회를 마련하여 우리는 다시 그 동안 나온 유물을 보고 신라문화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침 현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98호 분에서 유물 층에 도달하여『이때까지 보지 못하였던 물건이 나왔다』등등의 기사가 나돌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금년도 신라고분의 해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일반신문 독자들의 기대하는 말을 곳곳에서 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신라고분을 일반민중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꾸 파헤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하는 우려를 표명하는 인토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경주는 우리 나라의 거의 유일한, 아직도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고적지이다. 물론 그 옛적 있었던 건조물들은 자취를 감춘지도 오래고 경주시내에는 첨성대·분황사탑 그 밖의 몇몇 석탑이 솟아있는 이외에는 지상에 남아있는 유물이라고는 거의 멸실 돼 버렸다. 불국사의 유구의 일부와 석굴암마저 없었더라면 신라문화가 지상에 남아있는 것은 경주시내외에 있는 고분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기차를 타고 경주시내에 들어오면서 그 고분군이 시야에 들어올 때 말못할 감격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필자 뿐의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경주시 내외에 있는 고분은 한국사람에게 말못할 감회와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저 무덤을 다 파헤치고 그 속이 텅 비었다고 하면- 다시 말하면 우리안전에 보이는 저것이 아무 알맹이 없는 고분의 잔해라고 하면 아마도 국민학교 아동들까지도 경주에 수학여행 올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필자도 그 옛적 경주에 처음 와서 저 봉황대 밑에 서있는 오막살이를 보고 위대한 우리 선조의 무덤에 고개를 숙였고 우리 후손들의 생활에 우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의 손으로 저 고분을 파헤쳐서 그 안에서 보물이 나왔다고 신문이 떠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가 얻는바가 과연 무엇일까.
경주의 고분은 학자들에게는 벌써 그렇게 학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지 오래다. 왜? 경주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은 이미 국내외에 잘 알려진 까닭이다. 일제 때인 1920년대에 우연히도 발견된 금관총은 그 규모나 부장품으로 보아서 제1급의 고분이었다. 그러나 그 고분이 발견될 때까지는 분의 형태가 완전히 파괴되어 그야말로 조그마한 잔해만이 지상에 남아있어 과연 고분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도로확장공사 중에 그 부장품이 드러남으로써 관계사들이 당황하여 사후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마지막 처리를 한 것이 빈전경작과 매원말치의 두 경도대 교수이다. 우리는 그들의 보고서를 통하여 지금도 경주시내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의 구조와 유물의 일반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금관총은 우연한 발견이라 처음부터 주도한 학적발굴을 하지 못하였다하여 완전한 고분을 일부러 발굴조사 한 것이 서봉총이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왕릉은 곁에도 못 가던 그들이 한국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고분을 파헤치는데는 일부 일본학자들의 비판도 받았으나 어떻든 금관총에서 밝히지 못한 미지의 사실들을 밝힐 수가 있었다.
해방후에도 경주지방에서 발굴이 시행되었으나 그것들은 전부 이미 봉토가 없어진 것들로서 손을 대지 않으면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발견된 유물은 대체로 금관총·서황총과 역시 파괴된 고분이었던 식이총과 금령총에서 발견된 유물이외에 특별히 놀랄만한 새로운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의 발굴에서 이때까지에 알려진 사실보다 더 많은 새로운 것은 기대되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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