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껍질 벗기고 아픔을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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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들이 마지막 피를 토하다가 낙엽 되어 뒹굴 때마다 밀물과 썰물에 씻겨지는 바닷가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이 세상에 가냘픈 삶의 자국을 남기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우리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한번 사색의 오솔길을 걸어보자.
한국의 명물(?)인 높고 가시 돋친 험상궂은 담장은 비리와 부조리와 불의를 은폐하고 마음과 마음을 차단하는 불신을 암시하는 상징같이 느껴진다. 또 자신이 상실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고 불안과 초조의 도가니 속에서 헤매다 오니 잃어버린 자기 즉 인간을 되찾고자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길을 가로막는 절벽 같기도 하다.
짐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소처럼 인고를 되씹으며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도 살기 어려운 가난한, 그러면서도 때로는 비인간적 취급을 당하는 백성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특수층의 힘을 과시하는 권력의 성곽 같이도 보인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천부적인 것이므로 한 형제애로서 서로를 향해 작용해야한다.』고 「유엔」「인권선언」은 밝히고 자기생존권, 생활권을 역설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적·국내적 현실은 너무도 비정하고 불의와 폭력과 권력과 부정부패, 극도의 이기주의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다.
인구폭발이다, 식량부족이다. 경기불황이다. 떠들어대면서도 한쪽에서는 포식과 환락에 도취되는가하면 1년에 2천5백만 명의 귀중한 생명이 죽어 가는 사실은 유명한 배우의「스캔들」기사만도 못하게「뉴스」의 뒷골목으로 유실되고 있다.
그 돈의 몇 분의 1만 가져도 그 넓은 사막들을, 남미의 황무지들을 옥토와 곡창지대로 바꿀 수 있건만 전 인류를 네 번이나 죽이고도 남는 핵무기도 부족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기구를 증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손끝에 가시만 찔려도 온몸이 아프거늘 우리 사회가 온통 만신창이가 ,되고 내장이 썩어 가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감각, 이 질병을 빨리 고치라고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것이 오히려 바보짓이요, 죄가 되는 참상이다.
이 사회 병리는 쉽게 치유되는 외상이 아니라 중추신경이 마비된 무서운 병인 것 같다. 이런 모순과「카오스」를 외면하도록 무엇이 우리를 병들게 했는가..
그것은『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는』(말구8‥8) 눈과 귀, 그리고 문둥병자의 환부처럼 마비된 지성과 양심 때문인 것 같다.
지성과 양심의 빈곤과 마비는 갖가지 오류와 죄악을 파생시키고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보게되므로 급기야는 자기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허상은 자만·위선·향락추구·물질 및 배금의 마력 력…이라는 껍데기로 더욱 짙어지고 둘러싸임으로써 외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여 국가사회뿐 아니라 각자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을 계속하는 것 같다.
어느 철학자는 『결혼은 자기 묘혈을 스스로 파는 것』이라고 했다. 진정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감정·욕망·주장을 죽이는 희생이 요구된다면 국민 모두의 복된 삶을 위해서는 더욱 많은 희생과 봉사가 요구되지 않겠는가?
촛불은 자기 몸뚱이를 남김없이 불태움으로써 어둠을 밝히고 그 초는 자신이 불붙여짐으로써 자기존재의 의의와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한 알의 밀 씨는 썩음으로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의 자기생명을 재생시키고, 알차게 영근 밤알을 표출하려면 굳게 닫힌 가시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러나 많은 생명을 내고 현란한 불빛을 제공하며 알찬 결실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포기와 헌신이라는 고통을 지불해야만 했다.
우리는 너와 내가 아니라 한 덩어리가 되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거짓 껍질을 벗어 던지고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바로 보고 옳게 듣는 눈과 귀와 뜨거운 사랑으로 겨레의 아픔을 함께 나눠야할 것이다.
특히 위정자들은 현실을 직시하여 자신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는 제물이 되겠다는 자세로 헌신할 때 국민들은 환한 얼굴로 서로 믿고 얼싸안는 복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비록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남긴 삶의 발자국은 위대하고 하늘나라 영생의 기쁨도 누릴 것이다. -김 동 억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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