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위대한 재스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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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호 30면

안녕하세요? 저는 재스비라고 합니다. 김재섭. 키는 175에 얼굴은 그냥 남자처럼 생겼어요. 나이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할 나이는 오년 전에 지났어요. 제 고민은 제가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는 거예요.

한번은 식당에서 다른 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사랑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 여성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대화 내용은 그저 그랬어요. 아이들 교육, 시댁, 대출 등 시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어요.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죠. 쉽게 빠지는 사랑이라고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식사는 곧 끝날 테고, 이 하루도 이렇게 저물 것이고, 그러면 그냥 끝인 것이죠.

동네 빵집 아가씨를 사랑하기도 했어요. 팥빙수를 사러 가면 아가씨는 항상 팥보다 훨씬 많은 블루베리와 체리와 열대 과일을 잔뜩 넣어주곤 했어요. 저는 보았죠. 아가씨가 그릇에 얼음을 갈아 담고 이미 충분히 넣은 블루베리와 체리와 열대 과일을 들이붓는 광경을. 하마터면 저는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아가씨는 예뻤습니다. 드디어 완성된 팥빙수를 제게 내민 그녀는 자기 얼굴의 예쁜 생김새를 직접 느껴보겠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어요. 팥빙수는 맛있었어요. 너무 맛있어서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얼마 전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어요. 거기서 수지를 보고 전 당황했어요. 최초의 당황과 놀라운 기쁨이 지나고, 그녀의 출현이라는 기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수지는 5, 6학년 때 한반이었고 한 달 정도는 옆자리에 앉았던 짝이었어요. 키가 좀 작았고 얼굴이 가무잡잡했죠.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즉시 알아챌 정도의 눈부신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어요. 수지는 항상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물론 저도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수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돈 많은 집안에 시집간다고 수지가 수지맞았다고 동창들이 축하했는데 남편이 권위적이고 최근엔 폭력까지 사용해 결국 헤어졌다는 겁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가 흘러나오자 수지가 말했어요. “우리 늙었어. 젊었으면 벌써 일어나서 춤췄을 거야.” 그녀는 조금 취한 것처럼 보였어요. 흥분했는지 기분이 좋은 건지 글쎄 제게 이렇게 속삭였으니까요. “오늘 밤 나한테 키스하고 싶으면, 말만 해. 기꺼이 받아줄게.”

술집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다른 동창 녀석의 팔짱을 끼고 있었어요. 두 사람 진지하게 연애 중이라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어요. 그날 술값을 제가 계산했으니까요. 간신히 저는 축하해주었죠. “두 사람 잘 어울려. 사실 내가 중매를 설까 했었거든.” 2차를 가자는데 저는 빠졌어요. “방금 기억났는데, 오늘이 내 생일이야.”

집에 올 때 저는 빵집에 케이크를 사러 갔어요. 그 블루베리 아가씨가 초를 몇 개 넣을지 물어보더군요. 큰 초 두 개라고 말했죠. 그녀는 저를 바라보면서 그녀 특유의 감미롭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웃음을 터뜨렸어요. “손님, 좀 귀여우신 것 같아요.”

이거 ‘그린 라이트’ 맞죠?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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