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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 <제40화>기독교 백년(31)-강신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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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문안 교회와 언더우드 목사
1884년 9월20일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 부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처음으로 인천에 상륙한 날이다. 그는 「호레이스·뉴턴·앨런」 의사였다. 그는 오랫동안 닫혀져 있던 「은사의 나라」 한국에 최초로 온 선교사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알렌」 의사는 이보다 1년 앞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 되어 상해로 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국 선교를 개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행을 자원했다. 그래서 9월14일 선편으로 상해를 떠나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22일에는 서울에 입경 했던 것이다.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2년부터 미국 선교 본부에서는 즉각 한국 선교를 시작하자는 논과 신중을 기해 좀더 기다려보자는 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한국 선교 기금을 계속 내놓아 즉각 선교 개시를 결정했고 1884년 봄 「존·헤론」을 한국에 보내고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렇지만 「헤론」은 선교 본부의 지시대로 먼저 일본에 가서 정세를 살피면서 어학 공부를 해 가지고 입국하느라고 결국 1885년 6월에야 오게 되었다.
이렇게되어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아펜젤리」 「언더우드」 두 목사가 인천에 상륙한 1885년 4월5일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하게되었다. 「언더우드」가 내한함으로써 새문안의 역사도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뉴욕」 대학과 화란 개혁교회 계통인 「뉴부른스위크」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학교 재학 중부터 선교에 관심을 두고 준비를 했으며 처음에는 인도에 가기로 결심, 1년간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1883년 겨울방학 때 「앨버트·올트말스」 박사가 선교사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연한 적이 있었다. 최근 문호를 개방한 한국에는 1천3백만 명이 복음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문이 열렸으나 교회측의 무관심으로 1년여의 세월이 지나갔기 때문에 이제 더 기다릴 수 없어 선교 지망자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강연에 감동을 받았으나 자신은 이미 인도에 가기로 결심한 만큼 한국에 갈 다른 선교사가 나오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에게는 인도 선교사로 가지 못할 사정이 생겼다.
선교 본부가 기금 부족으로 인도에는 더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올 생각도 못하고 마침 미국 안에 있는 교회의 초빙을 받아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데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느냐? 한국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편지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길로 「뉴욕」 선교 본부를 찾아가 한국 행을 지망했다. 며칠 후인 1884년 7월 선교 부 실행 위원회는 만25세의 「언더우드」를 한국에 보낼 장로교 선교 목사로 임명했다.
그는 얼마동안 준비를 해 가지고 그 해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행 배를 타 다음 해 1월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에 와있던 선배 「헤론」 선교사 댁에 묵으면서 한국인 신자 이수정에게서 말을 배우던 그는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을 떠나 1885년 부활주일에 해당하는 4월5일 아침 제물포라고 불리던 인천에 상륙했다.
서울에 와서는 처음 「알렌」 의사가 시작한 국립병원 부설 의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총명하고 활동적이었으며 항상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 해 6월28일 저녁에는 정동에 있던 「알렌」 의사 집에서 외국인들이 처음 모여 주일예배를 보았고 그 후 계속해서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사람도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므로 새문안 교회의 시작은 실질적으로 1885년 7월부터라고 하겠다. 그 증거로 1년 후 1886년 7월에 「헤론」 의사의 어학선생으로 있던 도사 노춘경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었고 그 다음해에는 열네 명의 세례교인들이 모여 장로 두 사람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한 곳에만 가만있지 않았다. 황해도 솔내 교회에 가서 세례를 주고 성례를 집행했으며 서울주변뿐 아니라 멀리 평북 의주까지 가서 선교활동을 했다.
또 많은 협력자들과 힘을 합쳐 오늘의 여러 가지 연합사업의 기초를 세웠으니 연세대학교·성서공회·기독교서회 등이다. 「언더우드」 (원사우)의 외아들인 원한경은 연희전문의 교장과 새문안 교회의 장로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협동목사로 일했다. 그리고 장 손자 원일한은 새문안의 장로요, 연세대에서는 중앙도서관장으로 있다. 새문안과 함께 「언더우드」는 3대에 걸쳐 한국의 하나님나라 건설에 힘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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