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희망과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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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화와 평형의 출발>
우리의 시대적 상황은 한결 암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적 여건을 생각하면 밝은 그것은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숨막히는 상황이 그러했고, 해방의 혼돈, 남북의 분단, 6·25동란, 다시 그후의 정치·경제·문화적인 제미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 대양을 보는 듯 싶은 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마치 초로와도 같았다. 실로 불행하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중앙일보가 고고의 성을 울린 것은 뜻 있는 일이다. 이「고고의 성」이 또 하나의 암영, 또 하나의 타성, 또 하나의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실로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앙일보의 사시를 보면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고취하며』『사회복지를 위한 경제후생을… 구축하고』『…이성과 관용을 겸비한… 목탁을 자기하고…』있다. 이것은 종래의 신문들이 제시한 방향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대의 변환·시대의 상황에서 우러나온 『카운터밸런스』(김진만 교수)로 평가된다. 「보완적 조화」랄까, 「평형」이랄까. 그것은 어느 면에서든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는다. 독자의 편에선 고루한 구시대의 타성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의미를 찾게 해 주었으며 발행자의 편에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다.
오늘날 중앙일보가 막대한 독자를 확보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간 9주년을 맞는 현금, 새삼 토론의 여지는 없지 않다. 문제는 바로 이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해 마지않는 사시에 얼마나 성실한 신문을 제작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의 가식 없는 질책이 요구되며, 한편으로는 그것에 경청하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이런 진지한 성찰과 새로운 각성은 사시가 지향하는 뜻을 다시금 헤아려 봄으로써 가능할 것 같다. 사시의 기조는 한마디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내일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하는 신문을 만드는 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희망」의 뜻>
희망은 생명의 구조와 정신역학의 본질적 요소다. 희망을 잃으면 그 인간의 생명은 사실상 잠재적인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희망이란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정신적인 부수물이다. 우리의 사회를 보다 많은 활동성, 보다 건실한 의식, 그리고 보다 순수한 이성의 방향으로 변혁시키려는 시도에 있어서 그것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희망의 본질은 종종 그릇 해석되어, 희망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실은 그 정반대의 의식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원망이나 욕망과 비슷한 상태일까. 만일 그렇다면 더 좋은 집, 더 좋은 승용차,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화가 곧 희망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보다 많은 소비를 추구하는 욕망의 연장뿐이다.
끝없는 권태로부터의 해방이란 그런 것과는 관계없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말하면 구원을 찾는 것, 정치적 영역에서 말하면 보다 인간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사회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이며 문화적으로는 그 사회, 그 구성원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때때로 희망이란 한낱 체념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환상일 경우도 있다. 「피동적인 기다림」따위로 희망의 뜻을 설명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비현실적인 태도를 두고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런 상황을 끝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이다.
피동적인 기다림을 강요하는 것, 또는 그와 정 반대되는 위장도 있다. 그것은 급진적인 모험주의나 현실을 무시한 지적 백일몽과 같은 것들이다. 허무주의, 격정의 행사 따위를 희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희망의 표현>
희망은 생명구조의 한 본질적 요소라고 말했다. 그것은 생명의 구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인 신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신념이 없는 희망은 뿌리없는 수목과 같다. 신념없는 희망은 지속될 수 없다. 희망없는 신념도 마찬가지다.
신념은 아직 증명되지 않는 것을 믿는 정신력이며 참된 가능성(real possibility)을 아는 통찰력이며, 배태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지식의 힘이다. 그것은 표면을 꿰뚫고 핵심까지 투시하는 지식과 이해의 능력에 기인한다. 신념 가운데는 비합리적인 것도 있다. 이성적 사고나 감정에 있어서 각인의 내발적인 능동성의 결과로 얻어진 신념은 비합리적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주어진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여 거기에 몸을 맡기는 따위의 신념은 합리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이 우상이든 「리더」든 또는 「이데올로기」든 모든 비합리적 신념의 본질은 그 피동적 성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의 경우 무책임한 사실을 독자에게 진실로 제시할 때 결과적으로 비합리적 신념을 강요하는 제도와 매한가지다.

<불굴의 정신>
희망은 신념만으로는 그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인간생명의 구조속엔 희망과 신념에 결부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용기다. 명저『윤리학』의 저작자인 철인「스피노자」는 용기라는 말 대신에 『불굴의 정신』(fortitude)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상당히 인상적이고 설득력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오늘날 용기라는 말은 「이이러니컬」하게도 삶에 대한 열망, 사랑의 실천 등을 나타내는 뜻으로보다는 죽음에 대한 태도로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용기가 과격하게는 만용과 혼동되며 때로는 체념의 가식일수도 있다. 그것은 벼랑에 올라선 체념주의자가 그 벼랑을 뛰어 내리는 무모성을 발휘하는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용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철인이 『용기』대신에 『불굴의 정신』이란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 능히 촌도할 수 있다. 「불굴의 정신」은 희망이나 신념을 공허한 낙관주의 또는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러한 지위를 위태롭게 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이다.
불굴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제도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위협 속에서도 자유롭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는 희망과 신념이 삼위일체로 발현될 때 가능하다. 이런 경지에선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질 수 있고 생명을 사랑할 줄도 알게 된다. 그는 이미 세속적인 탐욕이나 속물주의 따위는 극복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물질 따위에 집착하지 않으며 어떤 우상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런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잃어버릴 것도 없다. 그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에 오히려 풍부하다. 스스로의 욕망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강하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태도에도 약간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에리크·프롬」과 같은 사회학자는 『삶을 바라지 않는 까닭으로 두려움도 모르는 태도』를 경고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의 결여에서 비롯된 제도다. 삶에의 두려움이 곧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도착을 낳는다.
「프롬」은 또 다른 하나의 오해를 자아낼 경우를 지적하고 있다. 『인간·제도, 또는 사상 등 우상에 대하여 공생적(symbiotic) 종속관계에 있는 사람의 태도다. 만일 우상에의 명령에 배반하거나 의혹을 품는 따위는 곧 우상과의 동일성을 잃는 위험에 직면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선 죽음조차 마다 않는 것이다. 가소로운 일이다.
희망과 신념은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며 바로 그 본성에 활기를 불어넣는 용기 또는 불굴의 정신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현상(status quo)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준다. 생명이 한자리에 머물러, 같은 상태로 괴어 있으며(심잠) 그것은 죽음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과 신념과 용기는 이런 것을 극복하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라고 생각된다.

<저해의 요소>
인간의 현실은 언제나 희망에 넘쳐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희망을 저해하는 또 다른 현실에 의해 그것은 위축되기도 한다.
우리가 정작 싸워 나가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어두운 현실, 비희망적인 상황이다. 세계의 지구을 돌아보면 그런 상황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보면 그런 어두운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의 정신을 짓밟고 사람의 모든 것을 다만 이념과 「슬로건」의 노예에 얽매이게 하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있다. 이런 세계에선 무엇을 위한 희망과 무엇을 위한 용기를 가져야 할지 실로 암담하다.
정치적인 위협의 분위기도 있다. 다만 한 정권의 존립을 위해 불안이 의식적으로 조작되며 다른 한쪽에선 전쟁의 공포가 끊임없이 과장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정치라기보다는 전쟁을 위한 정치를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과 가치의 기준을 혼돈시킨다.
이런 분위기는 공연한 군비경쟁마저 충동하고 있다. 인류전멸의 핵무기가 지연적으로 개발되고 그런 전략적인 상황은 인간에게 공연한 공포와 허무감을 던져주고 있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그 속에 매몰되고 만다. 실로 무서운 비인간적인 상황인 것이다.
경제적인 위협도 지적 할 수 있다. 자원의 고갈·개발을 위한 개발, 그에 따르는 공해의 확대, 식량의 부족 등은 인간의 하늘에 쉼 없이 검은 구름을 드리워준다. 인구폭발의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인구폭발에의 경고는 인간가족을 포용하기보다는 경멸해 마지않는 자학적인 국면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종족에 대한 사랑보다는 경멸이 앞서야 하는 이 지상의 현실은 결코 인간의 낙원은 아니다. 인구조절이라는 미명아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종족말살은 얼마나 가공할 일인가. 식량의 문제도 역시 비참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낟알을 줍기 위해 인간들이 짐승처럼 기어다니는 광경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현대의 문명은 역사상 일대 금자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문명은 인간을 기계의 일부, 한 부분품 같은 존재로 전락시켰다. 사람은 물질생산을 위한 기능인에 불과하고, 소비는 지상의 과제인 것처럼 되었다. 사람은 오로지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 사는 존재인 것처럼 되어간다. 「컴퓨터」의 지시를 받고 사는 인간, 할 일 없이 멍청해있는 피동적인 존재, 감성도, 정서도 없는 목석과 같은 인간의 정신, 완전히 관료화된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무력, 이런 것들은 문명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소외의 상황인 것이다.
희망의 저상, 희망의 좌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반작용은 파괴와 증오와 폭력으로 나타난다. 심리적으로 보면 파괴성은 곧 희망을 뒤집어 놓은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상황을 넘어 한 사회를 놓고도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희망이 없는 사회, 신념과 용기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엔 이미 미래도, 민족도, 계급 따위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의 과제>
인간과 사회는 희망과 신념의 행위로 인해 시시각각 부활한다. 그것은 신학적 의미로서의 한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고 이 현실을 보다 큰 활동성의 방향으로, 보다 인간적인 환경으로 변혁시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변혁이라는 말 대신에 발전 혹은 향상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중앙일보는 그 사시에서 희망과 용기를 「사회정의에 입각한 진실」에의 추구, 「사회고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경제후생의 신장」, 「이성과 관용을 겸비한 목탁」의 역할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다.
이런 희망의 과제들은 「밝은 신문」이라는 인상에서도 역연히 엿볼 수 있다. 「밝은 신문」이란 말은 때때로 오해와 혼동을 자아내기 쉽다. 「어두운 현실」을 밝게 비추어 주는 신문을 「밝은 신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두운 것을 어둡게, 밝은 것을 밝게 보여주는 신문이야말로 「정론의 신문」이며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가는 밝은 신문이다. 「정론의 환기」,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는 당연히 희망의 과제이며 용기의 소산이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인간을 존중하는 지상의 이념이다.
최근 중앙일보가 그 지면을 통해 「도의문화의 진작」에 남다른 성의를 베풀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인 신념과 문화적인 각성을 심어주는 일은 실로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도덕적인 향상은 사회정의의 존중에서, 옳은 법의 제정과 그 준법에서, 경제후생에서, 인간의 사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을 통해 실현되며 지켜진다.
교육의 확산과 발전은 그 실현을 돕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양으로 평가하려는 제도는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어떤 교육을 실시하느냐하는 「질의 교육」이야말로 중요하다. 이런 전제에 따른 교육의 실천은 한결 후세대를 신뢰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가르쳐 줄 것이 없는 세대는 후세대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불행한 존재이다. 이점에 있어선 젊은 세대의 냉소주의에 오히려 기대를 걸게 된다.
중앙일보는 이제 창간 9주년을 맞는다. 사시의 실현은 지나간 연대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연대에 더 큰 빛을 발해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의 새로운 책임과 사명은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최선을 다하는 신문」, 「밝은 신문」, 「새로운 신문」의 「이미지」도 그런 가운데 더욱 확고히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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