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박재삼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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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즘의 우리 시에 대하여 시적 감홍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와 그것을 복잡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로 나누어 본다면 어떨까.
수용자의 처지에서는 그럴수 있으리라고 본다.
전자의 시는 감정의 흐름세가 순탄하고 막힘이 없어 이해상의 난점이 없는 대신 맵싼 맛이 아무래도 덜하고 후자의 시는 몇 대목에서는 특출한 표현의 묘를 얻고 있으나 전체적인 「이미지」의 파악에 혼란을 빚고 있는 식.
전자의 시에서 보다 예술적 창의의 발현이 요구되고 후자의 시에서 통일성 있는 결구의 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너무 쉽다는 것과 너무 어렵다는 것은 똑같이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대체로 40대나 50대 시인이 전자의 경향을 따르고 20대나 30대 시인이 후자의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짚어 본다.
잡지에 시가 나오면 앞쪽의 선배 시인들 작품은 쉬 이해가 가나 느슨한 맛이 많은 편이고 뒤쪽의 젊은 시인들 작품은 군데군데 날카롭고 맵 싼 표현은 있으나 어쩐지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러한 세대 차의 격색은 과연 무엇으로 메울 수가 있을 것인가. 시의 세계가 다양해서 나쁠 것은 없고 그만큼 우리 시단이 풍성할 것만 같은데,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괴리의 양극화 현상은 비시의 조성과 그 발흥에 부채질을 가하는 것이 될지도 모를 위험성마저 안고 있다.
이러한 점에 심각한 우려를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나만일까. 중간 세대인 나로서는 선배의 시는 예술적이거라, 후배의 시는 어떤 질서를 가지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또 다르게 표현을 한다면 선배의 시는 너무 안역 하고 섬약 하고,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너무 말장난이 심하고 경직하다는 논법으로도 대위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 시단의 불만스러운 풍조에서 저만큼 동떨어져 있는 한 작품이 내게는 마음에 들었다. 정완영씨의 시조 『파계사추』 (「현대 시학」 9월호). 시류를 전혀 타지 않는 정갈한 시상이 멋진 표현의 묘를 얻어 상당한 감동을 주고 있다.
시조라고 하면 케케묵은 정형시로 낮추어 보는 사람도 있고, 또 새로운 형의 개척을 내걸어 시조 본래의 운율적 특성까지 상당히 접어두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씨의 이번 작품은 시조라는 정형이 얼마나 시상과 잘 어울려 있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끌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시조는 정형시이므로 어디까지나 자수의 제한을 받는다. 그 제한성 때문에 까딱하다간 자수율에 얽매여 시상의 억지 투입을 보이기 쉽고 또 그렇다고 형의 개방을 모방하다 보면 시조 그것이 되지 않는다. 시로서도 되어야겠고 형태도 갖추어야겠고 하는 이중의 부담 때문에 특히 어려운 문학 「장르」라 하겠다. 그런 어려움을 고루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겉모양 (형식) 도 갖추고 알맹이 (내용) 도 갖추고…그런 다음에 시조라는 이름을 얻게되는 이 빤한 상식을 정씨는 잘 구현해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물론 그 표현이 고풍스럽다는 지적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어적 문식투를 못 끄집어낼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이 있더라도 「시조가 서 있어야 할 분수와 그 자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파계사추』를 높이 사는 것이다. 이것은 씨가 시조라는 정형을 잘 인식하고 시를 쓰기 때문일 것이다. 시만 생각하다 형식미를 잃어서도 안될 것이요, 또 반대로 형식미만을 쫓다가 시를 잃어서도 안 되는 묘한 자리의 시조를 씨는 익히 알고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태도는 시조에서 「낡은 형식」과 「새로운 내용」이 똑같은 비중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본보기가 될법하다.
마지막 연의 중장 초구는 표현이 약간 진부하다는 것과 8자까지가 제한인 듯한데 9자는 파격이 아닐까하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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