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독이 수교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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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과 동독간의 수교교섭은 73년1월 동독의 「유엔」주재 「업저버」단이 미국에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제의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과 동독의 협상문호가 활짝 열린 것은 그보다 앞선 72년11월 당시 「브란트」 서독수상의 동방정책이 양독간의 기본조약 체결을 실현시킨 결과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구의 서독동맹국들은 서독정부가 독일을 대표하는 입장과 「할슈타인」원칙을 존중하는 자세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양독간의 기본조약이 체결된 후 1개월이 지난 72년12월이 되자 「나토」 각료이사회는 각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동독을 상대로 수교협상을 가질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냈다.
73년1월 미국이 양독의 「유엔」동시가입안 공동 제안국이 된 것은 사실상의 동독승인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73년8월9일 「스테슬」미국무성 동「유럽」 담당차관보는 「뉴요크」에서 「유엔」 주재동독 「업저버」단의 제2인자인 「만·헤케」를 만나 구체적으로 수교협상의 절차를 논의한끝에 대사관 위치 같은 것을 답사할 실무진을 상호 교환키로 합의했다.
그래서 미국무성 관리들은 73년8월27일 동독을, 9월에는 동독외무성 관리들이 「워싱턴」을 각각 방문했다.
수교를 위한 마지막 집중적인 협상은 올해 7월15일∼26일 사이에 열렸다. 양측은 이 기간에 협상을 종결짓고는 서명단계까지 왔다. 그러나 그때 동독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육로통행을 방해하는 사태를 빚어 서명자체가 지연되었다.
지난 8월11일 국무성 실무「팀」은 다시 동「베를린」을, 그리고 동독「팀」은 「워싱턴」을 방문하여 마지막 기술적인 문제를 토의했다. 동독의 협상대표 「쥐스」가 9월2일 마침내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리고 4일의 역사적인 조인식을 갖게됐다.
협상과정에서 동독의 2차 대전 배상거부가 큰 난제로 등장했다. 동독은 그들이 제3제국의 후계자가 아니라 새로운 독일국가라는 이름으로 배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문제에 미국의 모든 문제가 관련되는 점을 설명했다. 재미 유대인들은 협상 진전상황을 주시했다.
서독은 벌써 1952년 「뉴요크」의 유대인기구를 상대로 보상협정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에 8억2천만「달러」를 보상했고 보상법을 제정하여 도합 50억「달러」의 배상금을 여러 나라, 여러 단체를 통해 개인들에게 지급했거나 지급중이다.
동독은 결국 입장을 굽히고 보상협상을 앞으로 시작하기로 동의했다. 동독이 지불할 배상금은 유대인들에게 약 4억「달러」 그밖에 전체 보상으로 약 40억「달러」로 추산된다. 그러나 동독이 배상에 동의한 사실은 돈의 액수보다도 『우리는 제3제국의 후계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의 포기라는 점에서 한층 흥미롭다.
1965년 「발터·울브리히트」 동독수상이 「나세르」「이집트」대통령의 초청으로 「카이로」를 방문하여 동독과 「이집트」가 총영사관을 설치함으로써 시작된 동독의 서방세계 진출은 10년만에 미국과의 수교라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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