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길』메운 오열|고 육영수 여사 영결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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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생전에 「한떨기 목련」을 좋아했다는 고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오열 인파로 메워진 장안거리를 마지막 지나 영원의 집으로 갔다. 육 여사와 이승에서의 작별을 고하는 19일 서울시민을 비롯, 전날부터 전국 각도서 올라온 2백만 조위 행렬은 이른 아침부터 중앙청∼동작동 국립 묘지까지의 연도를 지키며 마지막 가는 여사를 비통과 흐느낌 속에 전송했다. 임시 휴무일인 이날 집집마다 조기를 달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거리는 일손을 멈추고 경건히 묵념을 올렸다.

<청와대 고별>
고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상오 9시40분 박 대통령과 영식·영애·기타 유족 및 청와대 직원들의 애도 속에 청와대를 하직했다.
발인식에는 박 대통령을 비롯, 지만군·근혜·근영양 등 3남매와 김 총리 내외·육인수 국회 문공위원장 내외·조태호씨 내외 등 유가족과 장례위 관계자·청와대 직원들이 참석했다.
고 육 여사의 영정을 향해 오른쪽으로부터 근혜양·박 대통령·근영양, 맨왼쪽으로 지만군이 나란히 서서 분향한 다음 잠시동안 묵념을 하자 주위에 있던 유족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박 대통령은 지만군과 고 육 여사의 유해가 안치된 운구 차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한바퀴 돈후 고 육 여사의 영정 앞에 다시 서서 또 한번 잠시동안 묵념을 올렸다.
평소 육 여사가 애용하던 승용차에 노란색과 흰색 국화로 단장한 「스테이트·왜곤」영구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로 뒤에 근혜양·박 대통령·근영양·지만군이 나란히 서서 이를 지켜봤다.
영구차가 청와대 정문을 나올 때 박 대통령은 손수건을 걷어 넣고 영구차 뒤를 잡고 잠시 뒤따라가다 차가 멈추자 다시 흐느꼈다.
박 대통령은 영구차가 정문을 나서서 중앙청 쪽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주시하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돌아서서 정문 옆 벚꽃 나무에 기대 손수건을 다시 꺼내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영결식>
고 육 여사의 유해는 길이 24m 높이 8m의 영결식단에 놓여져 평소 좋아하던 흰 국화, 노란 국화, 흰장미, 노란 장미, 흰 백합, 흰 「글라디올러스」에 싸였다
육 여사의 대형 초상화 밑에는 14개의 분향대에서 향이 피어올랐다.
『아내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있다면 결혼 이후 한번도 아내 생일을 잊어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고인의 육성이 방송될 때 조객들은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연도>2백만명이 장송
이날 중앙청 영결식장에서 동작동 국립 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명(경찰추산)의 시민·학생들이 나와 무더위 속에서도 고 육 여사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영결식장에 들어가지 못한 일반 시민들은 도로 양편 가로등마다 영결식 중계 고성능 「스피커」 1백여개가 설치된 세종로 연도에 상오 7시부터 몰리기 시작, 식이 시작된 상오 10시엔 30여만명에 달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상오 11시40분 영결식장을 나선 운구 행렬이 2km쯤 뻗쳐 서울 시청 앞 광장까지 도보 운구되는 동안 연도의 시민들은 허리 굽혀 절을 마지막 올렸으며 일부 아낙네는 향로를 들고 나와 합장 분향하기도 했다.

<장지>안장식 50여분
육 여사의 마지막 걸음이 멈추는 장지인 국립묘지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조객들이 몰려 상오 10시까지 7만여명이 유충문 앞 광장에 입장, 국립 묘지 정문 맞은 편에 올려다 보이는 산 중턱의 유택을 지켰다.
하오 1시30분 국립 묘지에 도착한 육 여사 유해는 내외 조문객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0여분 동안 안장식이 있은 뒤 20년 이상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은 유택에 모셔졌다.
오른쪽으로 제3한강교가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 목련꽃이 피고 지는 남산 식물원이 건너다 보이는 유택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뒷단에 대리석으로 단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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