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내준 개인정보 주권, 이번 기회에 꼭 되찾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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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14면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줄소송 이어지는 카드사 정보 유출 사태

시인 이상화는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빼앗긴 시대 속에서 광복에 대한 간절함과 저항 심리를 이 시로 표현했다. 이번에 터진 카드사의 대량 개인정보 유출사고와 그에 따른 2차 피해의 우려(내지 현실화)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뒤 한국을 유린한 역사에 비유할 수 있다.

카드 3사의 고객 인적사항 정보 1억400만 건이 불법 유출된 지금, 남의 것이 되어버린 국민의 개인정보주권에도 봄은 오는가.

최근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피해배상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소송을 공고한 로펌으로 1분에 한 건씩 소송 신청이 접수된다는 소문이다. 이 기회에 기업에 빼앗긴 개인정보 통제권을 되찾아오자는 소비자 주권운동이다. 이번 소송은 기업의 부당한 개인정보 수집과 관리에 경종을 울리는 공익소송이며, 기업의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소송을 시작한 이상, 결과 예측도 의미 있는 일이다. 승패의 핵심은 용역 직원의 개인정보 유출 과정에 카드사의 사용자 책임이 있는지,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여부다.

먼저 카드사의 불법 행위 책임이 인정될까? 수사 결과에 따르면 카드 3사의 보안시스템 개발을 맡았던 용역 직원이 USB메모리를 통해 회사의 개인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고객 신상 정보를 암호화하고 휴대용 저장장치에 다운받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정보보호의 기본이다. USB로 정보가 유출됐다는 사실 자체로 카드사의 직원에 대한 선임·감독상의 과실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직원 관리감독 부실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불법 행위가 성립한다면 법원은 얼마의 손해배상을 인정할 것인가. 이와 유사한 GS칼텍스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 법원은 정보를 빼낸 자회사 직원이 정보를 팔아넘기기 직전에 검거되면서 개인정보가 유통되지 아니한 경우 고객에게 손해가 없다는 이유로 기업 측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2012년부터 2013년 사이에 이루어졌기에 검찰 수사와 달리 이미 암시장에 유출된 개인정보가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용카드 발급 허가 등급 신용 소지자의 개인정보는 암시장에서 건당 최고 7만원씩에 거래되는 등 시장가치가 크다. 피해자가 스스로 시장에 자신의 정보를 팔 경우 7만원은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5일까지 카드 3사에 접수된 카드 재발급과 해지 요청은 모두 695만4000건이다. 얼추 700만 명이 일부러 매장을 방문하여 카드 재발급이나 해지를 요청한 것으로 이러한 절차에 투입한 시간을 비용으로 계산하더라도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다. 정보유출 및 그에 따른 후속조치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재산상 손해를 입은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신상 정보 유출에 따른 잠재적 금융 피해에 대한 스트레스 등은 기업들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것이 손해의 공평부담이라는 손해배상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결국 다른 사건과 달리 이 소송에서는 법원이 금융소비자들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 손해금액은 소송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개인정보보호 대책을 내놓았지만 금융사에 대한 규제만 강화했을 뿐 정작 피해자 보호 대책은 찾기 어렵다. 그나마 고객의 정보제공 선택권을 부여하고, 은행 고객 정보를 카드사 영업에 이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정도가 전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신용카드를 비롯한 금융 거래 약관 전반을 점검하고, 개인정보 제공과 관련된 불공정한 부분을 대폭 정리해야 한다. 차제에 개인정보 유출 시 금융사의 개인정보 보호 의무 불이행 책임이 성립하고 그에 관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조항을 약관에 명시해야 한다. 고객의 입증책임 부담을 경감하는 조항과 함께 구체적인 손해배상예정액 규정을 신설하는 등 금융사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의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럴 때만이 빼앗긴 개인정보 주권에 비로소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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