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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 코드는 ‘뉴 러시아’ … 과거 유산으로 미래 향한 메시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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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04면

8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 소치 겨울올림픽 개회식에서 각양각색의 조명들이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다. [소치 신화=뉴시스]
소치 올림픽 개막식 주요 장면에 등장한 러시아 예술가 ① 5막 ‘봄의 제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1809~1852) 『죽은 넋』의 백마 트로이카 이미지.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 전위 발레 음악 ‘봄의 제전’ ② 8막 ‘나타샤 로스토바의 첫 무도회’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 『전쟁과 평화』 중 주인공 나타샤 로스토바가 사교계 데뷔 무도회에서 사랑에 빠지는 장면 ③ 10막 ‘모스크바’ 조각가 베라 무히나(1889~1955) ‘노동자와 집단농장의 여성’ 조각 이미지 ④ 12막 ‘평화의 비둘기’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 ‘백조의 호수’ 음악 ⑤ 올림픽 기(旗) 행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61)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2대 발레 극단으로 꼽히는 마린스키의 전속 지휘자

8일(한국시간) 개회식을 치른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은 대회 전부터 숱한 악재에 시달렸다. 이슬람 반군의 테러 위협이 이어졌고, 올림픽 파크의 부실한 시설에 대해 서구 언론들은 비아냥을 쏟아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은 러시아의 인권 탄압 등을 이유로 개회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러시아 국민도 약 500억 달러(약 54조원)를 쏟아부은 ‘역사상 가장 비싼 올림픽’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소치 올림픽 개막 17일간의 겨울왕국 드라마 시작

걱정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인들을 향해 소치 올림픽 개회식은 ‘러시아의 꿈’ ‘강대국의 부활’의 메시지를 전했다. 4만 명이 몰린 개회식 장소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은 2시간30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다양한 콘텐트로 꽉 채워졌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다
“러시아여,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내게 답을 다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1809~1852)는 『죽은 넋』(1842)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물었다. 러시아는 소치 올림픽 개회식에서 그 답을 내놓고 싶어 한 것 같았다. 개회식의 주요 모티브가 『죽은 넋』에 등장하는 백마 트로이카라는 것에서 러시아의 염원을 읽을 수 있었다.

소치 올림픽은 러시아가 개최하는 첫 번째 겨울올림픽이다. 1980년 모스크바 여름올림픽 이후 냉전시대에서 벗어난 첫 올림픽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소치 올림픽을 시작으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미국과 대립했던 초강대국 소비에트연방(소련)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는 동시에 더 강한 러시아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

일찌감치 개회식 주요 내용은 러시아의 문학·고전음악·발레 등으로 채워질 것으로 예상됐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3막 피날레가 개회식의 하이라이트였다. 백조로 오데트 공주가 마법에서 풀려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압축해 보여줬다. 족쇄에서 풀린 주인공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고 기뻐하는 장면은 웅장한 크레센도로 마무리됐다.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전쟁과 평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나타샤 로스토바의 첫 무도회’도 부드럽게 진행됐다. 주인공 나타샤가 사교계에 막 데뷔하는 것처럼 러시아도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다시 나서겠다는 뜻을 담았다. 뉴욕타임스는 “새로 태어난(recreated) 러시아의 모습을 잘 전달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사회주의국가였던 소련은 잊으라는 메시지”라고 풀이했다. 냉전시대의 소련을 초월한, 더 강한 러시아로의 목표설정이었다.

개회식 직전 콘스탄틴 에른스트 개회식 총감독은 “러시아 이야기를 하겠다고 시간을 길게 끌진 않을 것이다. 개회식의 고객은 관중과 시청자”라고 말했다. 자국 역사를 길게 홍보하느라 되레 지루해져 버린 2008 베이징 여름올림픽 같은 개회식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영화감독다운 연출 전략이었다.

에른스트 총감독은 개막식 테마곡 중 하나로 여성 2인조 그룹 타투의 노래를 택했다. 지난해 러시아가 반(反)동성애법을 제정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가운데 동성애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타투를 무대에 세워 방패로 삼은 것이다. 에른스트 총감독은 “솔직히 말해 현대 러시아 뮤지션 중 그나마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그룹을 택한 것이다. 우린 (2012 여름올림픽 개최지) 런던처럼 비틀스 같은 그룹이 없으니까…”라며 웃어 보였다.

행사 초반 공중에 뜬 오륜기 모양의 대형 눈꽃 조명 중 하나가 펴지지 않아 ‘사륜기’가 된 실수도 있었다. 펴지지 않은 조명은 ‘하필’ 아메리카 대륙를 상징하는 오른쪽 맨 위의 원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개회식을 흡족하게 본 것 같았다. 행사가 끝나자 푸틴 대통령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포옹을 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바흐가 IOC 위원장에 당선됐을 때 곧바로 개인 휴대전화로 축하 전화를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푸틴이 밀어붙인 대회 결과에 주목
소치 올림픽은 푸틴 대통령의 의지로 개최되는 대회다. 스포츠 외교와 국력 과시를 바라는 푸틴 대통령은 겨울올림픽 유치를 맨 앞에서 지휘했다. 2007년 7월 과테말라에서 열린 개최지 투표에서 소치는 한국의 평창을 51-47로 이겼다. 푸틴은 장외에서 막대한 로비를 벌였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자존심을 접고 그리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연설하며 유치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7년 전까지 소치는 허허벌판이었다. 러시아의 대표적 휴양지인 소치는 사계절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는 날씨와 아름다운 흑해를 품고 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별장과 푸틴 대통령의 별장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시설이었을 만큼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7년 전 평창의 경쟁지였던 소치를 찾았는데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올림픽이 치러지는 건 푸틴이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소치로부터 700㎞ 떨어진 볼고그라드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지난달에는 소치 인근 남부 지역에서 총에 맞아 숨진 6명의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여느 겨울올림픽과 비교해 5배 정도 많은 6만 명의 보안요원을 투입했다. 푸틴 대통령은 “안전한 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현지에서 느끼는 테러 공포가 생각보단 크지 않다. 대신 녹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뚜껑 없는 맨홀, 온수 또는 냉수만 나오는 욕조 등 선수단·취재진의 숙소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대회 전부터 ‘칸막이 없는 변기’로 악명을 얻은 소치의 시설물을 외신기자들은 신나게 조롱하고 있다. 이에 대해 드미트리 코자크 러시아 부총리는 “호텔 객실이 10만 개 이상이지만 공식 불만이 접수된 건 103건에 불과하다. 불만 사항들은 모두 잘 처리되고 있다”고 진화에 나섰다.

말 많고 탈 많은 소치 올림픽은 개회식 맨 마지막에 성화를 점화하며 17일간의 일정을 시작했다. 최종 성화주자로 나선 러시아 아이스하키의 전설 블라디슬라프 트레티아크(62)와 피겨 영웅 이리나 로드니나(65)가 붙인 성화는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 밖에서 힘차게 타올랐다. 올림픽을 반대하는 여론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개회식을 찾은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성화처럼 활활 불이 붙었다. 자원봉사자로 개회식에 참가한 아나스타샤 포포프(21)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자랑스럽다”며 러시아 국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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