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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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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무장습격·약탈행위 자행>
이 제6사장 김일성의 이름이 일만 측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5년말께부터 이며 일제의 함남국경지방 경찰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6사가 장백현 오지에 근거지를 잡은 1936년 여름께부터이다.
그리고 제6사장 김일성의 이름이 우리 국내 민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36년 9월 11일자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비롯한다. 『혜산대안에 출몰하는 적단은 1백50명∼1백60명으로 그중 3분의1은 만인이고 3분의2는 조선인인데 조선여자 7명도 끼여있으며 복장은 관헌의 의복과 같고 무기는 「로시아」식 장총, 중국식 장총 및 권총을 휴대하고 만약은 각자 3백발씩 가졌으며 경기관총 2대, 대포 1문을 가지고 있는바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계통의 부대로서 장백현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은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명 내지 20명씩으로 된 약탈반을 조선인 부락에 파견하여 식료품을 약탈하고있다』라는 것이 그 첫 기사였다. 「경성일보」에는 1936년 9월 29일자로 첫 기사가 실렸는데 『함남국경정보에 의하면 대안 장백현 19도 구인보에 비수 김일성 일당 1백20여명이 내습하여 식량, 물품을 강탈하고 2, 3일 후에 다시 온다고 하고 갔다한다. 이 같은 적정을 종합하건대 김일성 일파의 동북인민혁명군후속부대가 장백현 내에 침입한 것 같다』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에는 1936년 10월 7일자로 첫 기사가 실렸다.
국내의 각 신문은 1936년 9월 또는 10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사이 8, 9회 내지 10여회에 걸쳐 이른바 공비 김일성 부대의 동정을 보도했는데 습격·약탈·방화·납치·교전 등에 관한 기사이다.

<의병장 김일성 여부로 혼란>
당시의 항일연군의 각 부대들은 그들 조직을 통한 물자획득의 길이 이미 막혀 무장습격으로 약탈을 일삼아 왔다. 때로는 약탈·납치·방화도 했다.
연군부대에서는 공작원 또는 대원을 부락에 보내 식량의 제공을 종용한다. 부락에서 응하지 않으면 습격하며 또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데 대한 보복으로 방화를 했던 것이다. 납치 역시 사실이다. 제6사에서는 광복회 조직을 통해 대원을 획득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사람을 잡아다놓고 교양을 주어 대원으로 눌러 앉히는 방법과 일단 귀가시켜 공작원으로 쓰는 방법, 그리고 인질로 해서 물품과 교환하는 방법을 썼다.
국내신문에 오르내리게 된 김일성의 이름과 그 부대의 동정에 대한 국내민중의 반응은 기대와 의문의 교착이었다. 「기대」라고 하는 것은 국내민중들이 이제 6사장 김일성을 1907년부터 활약했던 함남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 장군 또는 1919년부터 항일투쟁에 나섰던 일본육사 출신 김일성 장군으로 착각했던 데서 온 것이었다. (이 두 김일성 장군에 대해선 후장에서 다룸) 「김일성」장군의 소문은 1920년대 전반기에 제일 자자했었는데 한동안 그 소식이 전혀 끊겼다가 1936년 가을에 이르러 다시 함남국경지방에 「김일성」부대가 출몰한다니까 그 옛 「김일성 장군」의 재등장인줄 알았던 것이다. 필자가 수집한 많은 증언이나 자료가 이 착각을 입증하고 있다.
또 「의문」이란, 옛 「김일성 장군」으로 착각했으므로 「김일성 장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항일투쟁을 하던 애국투사였는데 어쩌다가 공비가 되었느냐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국경지대를 소란하게 하고 있던 제6사장 김일성의 존재가 화제에 오르게된 것은 1937년 6월 4일 밤의 보천보 습격사건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동시에 이 사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비밀리에 진행 중이던 광복회의 지방조직을 노출(혜산 사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또 이것을 계기로 정체불명이었던 제6사장 김일성의 신상이 포착되고 그 부대의 본질이 드러났다.

<제4사 부대도 국내침투>
1936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함남 갑산군 대안 장백현 일대에서 주로 한인농촌을 털고 다니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부대의 강탈적 보급작전은 장백현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내까지 뻗쳤다.
1937년 5월에는 항일연군 제2군 제4사 부대 약 2백명이 무산군에서 남하하여 갑산군 보천면 포태리 상흥경수의 목재작업소를 습격했다. 함남북 국경일대의 각 경찰서는 총동원되다시피 해서 이 제4사부대의 추격에 나섰다. 제4사 부대는 혜산읍에서 약 40리 떨어져 있는 백두산록 심봉·청봉의 밀림지대로 자취를 감추었고 경찰은 이 지대를 포위하고 수색작전을 펴고있었다.
당시 국내신문은 이 제4사 부대를 『중국인 주수동이 인솔하는 제4사 부대』 또는 『최현이 지휘하는 제4사 부대』등으로 보도했는데 주수동은 제4사장이었고 최신은 그 제4사 제1단장이었던 때이다. (최현은 1938년 2월에 전사)

<6사장 김일성 보천보 습격>
이렇듯 국경 경찰들이 제4사부대의 공격에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제6사장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의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동사조직과장 권창욱 등 간부 수명을 장백현 19도구덕부동 오지 산 속으로 소집하여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부락의 습격을 결정했다.
6월 4일 김일성은 참모장(허모)부관장 (고모)조직과장 권창욱, 부관 김주현 등 수명의 간부와 더불어 작전을 짜 습격대 총사령부,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할 진공대, 농사시험장을 습격할 진공대, 교통차단 및 전신·전화 등 통신기관파괴와 적의 구원대를 막을 방어대, 관공서·주택·점포에 침입하여 총기·탄약 기타 금품을 약탈할 물품약탈대, 그리고 대원의 행동을 검열·독려할 검열대 등 6대로 나누어 편성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인 26호, 중국인 2호를 합쳐 3백2호가 있었다.

<차례>
제5장 6사장 김일성의 정체
(34)김일성에 관한 신문보도
(35)보천보 사건
(36)5사장 김일성에 관한 소문
(37)6사장 김일성의 성분
(38)6사장 김일성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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