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100명 태웠다는 화물칸, 50명 들어서자 빽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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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12면

기념관에 보관된 당시의 화물열차. 나치 독일은 한 칸에 많게는 100명의 유대인을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사진 김성희]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어원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선택한 표현으로, 유대인들은 이 말 대신 히브리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쇼아(ha-Shoah, השואה)’라는 말을 쓴다.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은 600만 명. 비유대인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900만 명이 훨씬 넘는다.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20세기 최악의 인류 잔혹사다.

밀라노서 열린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

밀라노 쇼아 기념관 입장을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2005년 11월 1일 유엔 총회는 1월 27일을 홀로코스트(쇼아·Shoah) 희생자 추모의 날로 정했다. 옛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해방시킨 날이 1945년 1월 27일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날 추모행사, 음악회, 관련 영화 상영, 토론회 등을 진행하며 쇼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데 올해 밀라노에서도 여러 행사가 열렸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밀라노 메모리얼 쇼아(Memoriale di Shoah)의 일반인 공개였다.

밀라노 메모리얼 쇼아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자녀협회와 밀라노 유대인 공동체, 동시대 유대인 자료 재단, 이탈리아 유대인 공동체, 산타 에지디오의 주최로 2002년 기획됐다. 밀라노 중앙역 1층 우측에 있는 21번 플랫폼과 주변 약 5000㎡ 공간을 건축가들이 리모델링해 약 7000㎡ 규모의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쇼아 기념관으로 변신한 21번 플랫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태가 그대로 보존된 유럽 유일의 공간이다. 25년부터 31년 사이에 지어진 밀라노 중앙역은 지상 2층의 20개 메인 플랫폼 이외에 우편물과 화물을 운송하기 위한 플랫폼을 지상 1층에 따로 둔, 당시 유럽에서는 볼 수 없던 매우 진보적인 형태의 기차역이었다.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항복한 뒤 독일군은 이 21번 플랫폼을 화물 운반이 아닌 유대인 강제송환에 사용했다. 43년부터 45년 사이 이탈리아에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은 약 8000명에 이른다.

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가 독일의 반유대주의종족법을 본보기로 한 반유대법을 공포한 뒤 유대인 인구조사가 실시됐다. 이탈리아 유대인은 물론 이미 유대인법이 실시되고 있던 독일과 주변 국가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친 유대인들도 인구조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유대인 이름을 가진 자가 붙잡히면 그의 가족도 모두 끌려갔다. 이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싸운 유대인 상이군인들도 있었지만 독일군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정치범,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집시, 장애인, 러시아 전쟁포로, 프리메이슨 등도 함께 잡아갔다. 당시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은 이름 대신 유대인을 상징하는 알파벳 E(Ebreo·이탈리아어로 유대인)로 시작하는 일련의 숫자로 기록됐다.

기념관을 찾은 사람의 많은 수가 유대인이었고 대부분 쇼아 관련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TV나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부모를 따라온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진입로에 메모리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INDIFFERENZA(무차별)’라는 거대한 글자 조각이 보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릴리아나 세그레 할머니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상징물로 더 이상의 인종차별이나 박해가 없기를 기원하는 희생자들의 염원이 이 한 단어에 함축돼 있다.

21번 플랫폼의 벽은 전쟁 후 석고를 입혀 페인트칠됐지만 기념관으로 결정된 뒤에는 겉 장식을 떼어내고 예전과 똑같은 상태인 시멘트 벽으로 복원했다. 40년대 촬영된 흑백영화 다큐멘터리 영상에는 당시 이곳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중앙의 긴 복도 왼편에는 플랫폼과 유대인 운반에 관련된 자료와 사진이, 오른쪽엔 당시 끌려갔던 사람들의 경험담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장 끝에서는 생존자 인터뷰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들으려는 많은 방문객이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투어 내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커다란 열차소리가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가이드를 따라 열차로 향했다. 이탈리아 철도공사가 쇼아 기념관에 기증한 열차는 당시 유대인 및 모든 수감자를 운반했던 바로 그 열차다. 열차 상부 좌우에 철망으로 짠 두 개의 작은 창문을 제외하면 외부로부터 공기나 빛이 들어올 구멍이 없는 화물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칸에 말 6필 이상은 싣지 않았었지만 1943년 12월 6일부터 밀라노 중앙역을 떠난 이 열차에는 칸마다 무려 60명에서 100명까지 실려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밀라노에서 수용소로 기차는 20번 출발했다. 이 중 12번은 유대인만, 5번은 외국인과 유대인·정치범들이 뒤섞인 혼합, 그리고 나머지는 정치범만 싣고 떠났다고 한다. 사람이 다 차면 기차 외부에는 ‘명’ 대신 ‘Stcke(독일어로 조각, 개수)’라고 써서 이들을 물건 취급했다. 희생자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동시에 이동 관련 책임자들에게 죄의식을 덜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화물칸 안으로 들어가자 한 어르신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우리 함께 붙어 서 봅시다”고 했다. 가이드를 중심으로 50명의 방문객이 바짝 붙어 서자 거의 꽉 찼다. 움직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없을 정도여서 100명이 어떻게 일주일간 버텼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기차로 밀라노에서 볼차노·포솔리·아우슈비츠 등의 강제수용소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일주일이 걸렸다. 로마에서 출발하면 2주 이상 걸렸지만 중간에 화물칸 문이 열린 적은 없었다. 잡힌 당시의 옷차림 그대로 떠난 사람들은 냉난방시설이 없는 화물칸 안에서 물이나 음식, 위생시설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기차가 강제수용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노동 가능 여부로 선별됐는데 건장한 20%에게만 노동의 기회가 주어졌고 나머지 80%는 가스실로 보내졌다(강제수용소 중 화장터와 가스말살시설이 함께 있던 곳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6개뿐이었고 나머지는 화장터만 있는 강제수용소였다).

열차칸에서 나와 기차 앞부분의 넓은 공간으로 이동했다. 바닥에는 20번의 수송을 기억하기 위해 기차가 떠난 날짜와 목적지를 적은 20개의 비석이 박혀 있었다. ‘사람 수송 금지’라고 쓴 표시판이 멀리 벽에 보였다. 21번 플랫폼에서 일한 사람들은 이탈리아와 독일 군인들, 그리고 이탈리아 철도청 직원들이었는데 당시 많은 철도청 직원들이 이 일에 관여하기를 거부했었다고 한다.

관 안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영상으로 보여 주는 ‘이름의 벽’이 있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정체성을 되돌려 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기념물이다. 자금 부족으로 지금은 첫 2량을 타고 출발했던 774명의 이름만 영사되고 있지만 앞으로 완공되면 전 이탈리아에서 출발했던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모두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름이 주황색으로 표시된 사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쇼아 기념관에는 4만5000권의 관련 책자가 소장될 도서관과 200명이 앉을 수 있는 강당도 마련돼 있으며 기금이 모이는 대로 문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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