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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제자=김홍일>|그 전설·실존·오명을 밝힌다|조선 혁명군의 최후|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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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선혁명군의 숨통을 틀어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일만 군경은 몇 차례에 걸쳐 대 포위공격작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 대략 세 가지의 분석이 있다.
첫째는 혁명군의 고국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정신무장이 예상외로 견고했다는 점, 둘째는 혁명군이 지리에 밝아 대 공격에 직면하면 철수, 은신에 유리했다는 점, 세째는 혁명군의 근거지일대의 한인농민들이 모두 혁명군을 위해 정보를 제공했으며 물자를 자진 제공하고 있었다는 점. 이상 세 가지의 원인분석을 한 일만 군경은 혁명군의 활동지역일대의 한인농민들을「통비자」로 규정, 이들을 뿌리뽑는 것이 혁명군박멸의 첩경이라 결론짓게 되었다.

<한인농민들 군자금제공>
사실 우리농민들은 일만 군경의 동태를 샅샅이 혁명군에 통보해주었으며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군량미·의복 감·군자금 등을 모아 혁명군을 지원하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에 대한 지원은 심지어 일만 군경이 자기들에게 양순하다하여 조직한 친일적 자치조직체인 조선인민회의 십 가장, 구장제도의 내부에서도 있었다.
조선혁명군의 불굴의 항일투쟁 뒤에 숨은 우리 이주동포들의 2중·3중의 노고와 항일정신은 국내동포로서는 상상을 절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학정에 못 견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요, 그들은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난폭한 수탈에 텃밭마저 빼앗기고 낮선 땅 만주로 유랑했던 동포들이었다.
그래도 15세 이상 30세 미만의 청소년들을 혁명군에 입대시켰고 집에 남은 노인·부녀자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죽음으로써 싸우고 있는 혁명군의 뒷바라지를 위해 등은 꼬부라지고 손발은 피맺혀 찢어지기까지 일했던 것이다.
1935년 여름엔 남만일대에 큰 수해가 났었다. 논, 밭은 온통 물 속에 잠겼고 곡식들은 죄다 물살에 떠내려갔었다. 이 막대한 피해 때문에 농민들은 자체의 식량문제해결이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혁명정부에서는 관할지역 일대의 농촌에 곡물반출 금지의 방곡령을 발포하고 농민들 식량확보 책부터 세운 일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우리 농민들은 혁명군에 대한 식량공급부터 우선적으로 했다.
일만 군경은 이 우리농민들(소위 통 비자)에 대한 일제검색에 나섰다. 1936년 2월12일을 기해 소위 주동적 통비 용의자 87명을 지목하여 검거에 나선 일만 측은 70명을 체포했었다.
1936년 10월9일 평북 벽동서 노장출장소가 혁명군에 의해 피습, 순사 4명이 사살되고 기관총 1정을 빼앗긴 사건에 놀란 총독부 측에서는 일만 측에 평북대안의 조선혁명군 박멸 책을 독촉했으며 이에 따라 일만 군경은 관전·집안·통화현 일대에 대한 집중공격작전에 나섰다.
이 36년 추계 대 공격작전은 온 산야를 누비는 철저하고도 치밀한 작전이어서 조선혁명군뿐 아니라 다른 항일부대에도 심대한 타격을 준 전투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서는 기진맥진한 항일 병들이 진퇴양난으로 혹은 투항하는 자 혹은 도주하는 자 등이 속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조선혁명군에서는 고이허를 비롯하여 유력 간부 수명이 검거되는 큰 손실이 있었다.
나머지 항일부대들은 각기 요새에 구축해놓은 산채에서 월동하면서 다음해 초목무성 기에 일제히 궐기할 것을 기약하고 양식과 무기, 탄약 등을 입수키 위해 각지로 대원들을 잠행 시켰다. 그런데 이때에 우리혁명군의 가장 긴밀한 동맹군인 왕봉각군에 일대불행이 닥쳐왔다. 1937년 1월에 들어서 총독부경찰의 월강내사반이 요령구국의용군 총 사령이자 중한항일동맹회군사위원장인 왕봉각의 소재를 탐지해 내어 이를 만주 국 기관에 알리자 드디어 3월27일에 왕봉각은 체포되고 만 것이다.

<중국인 항일 명장…왕봉각>
동변도에 있어서의 반만 항일의 패자로 알려졌던 당취오가 1933년 겨울에 북경으로 피신한 후에는 왕봉각이 동변도의 산야를 주름잡는 중국인 항일의 맹장이었는데 그는 5년여의 세월에 걸쳐 반만 항일투쟁을 계속하여「동변도의 영웅」또는「녹림의 효웅」이라 불렸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자기 이름과 같은 지명인 통화현왕봉각 이란 곳에서 약 6km 떨어진 지점에서 만주 국 군경에 의해 자기 처 및 부하 6명과 함께 붙잡혀 모두 같이 4월6일에 총살형을 받았다.
그들은 붙잡힐 때도 최후까지 응전하여 부하들은 모두 부상당했으며 왕은 붙잡힌 후에도 태연자약, 조금도 반만 항일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총살될 때도 미소를 머금은 채 죽어갔다.
왕의 처는 당시 22세, 4년 전에 납치되어 옥의 처가 되었는데 그들이 처형될 때 4살 짜리 아들이 있었다. 왕은 술·담배·아편도 모르는 반만 항일의 신념에만 살고 싸우다 죽은 사나이였다. 왕의 죽음으로 그 부대는 끝장이 났었다.

<10일 동안 미증유의 공격>
불행은 왕봉 각 군에 만 닥친 것이 아니라 우리 혁명군에도 거의 같은 때 닥쳐왔다. 첩보공작에 비상한 총독부 경찰이 드디어 조선혁명군 본부의 소재도 알아낸 것이다. 평북초산·위원 양서에서는 조선혁명군 총 사령 김활석 이하 85명이 환인현신관령 문압분의 산채에 잠복중임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평북도경에서는 안동 공서 및 관동 군 특무기관과 협의하여 공동작전에 의해 조선혁명군 근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대화전고등 과장 이하 1백2명을 출동시켜 3월20일부터 29일까지 10일간에 걸쳐 만주 국 측과 합동으로 미증유의 대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난공불락이라 일컬었던 조선혁명군의 산채는 정복되고 11명은 피살, 2명은 체포되고 나머지 대원들은 산지사방하는 일대패전을 당했다.
일제의 기록은 이 작전을 가리켜『…이에 따라 20여 년의 오랫동안 조선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 치안의 암이라고 일컬어지던 조선혁명부도 드디어 재기불능에 빠졌다』고 적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4윌9일에는 혁명군 제1사 사령 최종윤(최석용의 또 하나의 별명)이하 70여명이, 5윌21일에는 혁명군정부의 통령이었던 김동산이 발붙일 곳을 잃고 환인현 특별공작 반에 투항하고 말았으며 많은 대원들도 투항, 혹은 귀 농의 길을 밟았다.

<전열재정비로 재기 노려>
그러나 이러한 불행과 타격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은 아주 전멸된 것이 아니었다. 총 사령 김활석이 요행히도 살아 남아 잔여대원들을 규합,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활동기반이었던 근거지, 한인농촌이 송두리째 적에 뺏겼고 동맹군마저 소탕된 처지에 전열재정비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심초사하던 중인 1938년 9월6일 총 사령 김활석 마저 심복부하 몇몇과 더불어 체포되고 마는 비극이 왔다. 그는 해룡 현에서 잡혀 한인만주 국 경찰관에 의해 개원 현으로 압송도중 일차도주에 성공했으나 다시 잡히고 말았다.
총 사령 마저 잃고 갈 데가 없어진 잔여대원들은 할 수없이 중공당의 동북항일연군(동북인민혁명군의 후신)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로써 망국 이래의 의병항일독립투쟁의 전통을 이어왔던 우리의 마지막 재만 독립군인「조선혁명군」의 깃발은 거두어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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