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는 원형대로 보존을|「리처드·러트」신부 고별 강연 「체한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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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누구보다도 한국을 좋아했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했던 외국인 중의 한사람인 성공회 대전 교구 주교「리처드·러트」신부 (48·한국명 노대영)가 체한20년 만인 오는 5월8일 이한, 고국인 영국으로 귀국한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20년 동안을 하루같이 한국민과 함께 지낸 「러트」씨는 특히 시조를 비롯한 한국 고전문학과 문화재 등을 깊이 연구, 조예가 깊었고 많은 우리 고시조를 영역하기도 했으며 외국어 대학 및 여러 고교에서 영문학과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등 한국문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한국을 떠나면서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고 서점들이 없어져 가는 게 가슴 아프며, 고귀한 문화재들이 원래 그 문화의 창조지였던 지방에 원형대로 잘 보존 관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화를 그처럼 사랑했던 「러트」씨는 영국 서부 「큰월」부 「트루도」교구 보좌 주교로 전임하면서 18일 저녁7시 주한 영국 대사관이 마련한 환송「파티」에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지난날의 한국 생활을 회상하면서 『한체 20년』이란 고별 강연으로 이 한의 아쉬움을 달랬다.
내한 동기, 한국에서 느낀 점등을 밝힌 「너트」씨의 고별 강연 내용을 간추린다.
『나는 1933년부터 한국에 와있다가 6·25전쟁 때 포로가 돼 북한 공산군 포로 수용소에서 3년 동안 억류돼 있다가 석방된 「쿠퍼」주교가 영국에 돌아와 쓴 수기와 젊은이들에게 한국에 가서 선교 사업을 해 보라는 그의 호소문을 보고 내한을 결심, 1954년 한국에 건너왔다.
한국에 온 뒤 나의 전공이었던 「이탈리아」시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 한국 시가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2년 후에는 2편의 시조를 영역했다.
그후 평택 여중·서울 오류동 성공회 신학교 등에서 일하면서 서울대 대학원과 휘문 고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고 젊은 대학생들과 많이 어울려 지냈다. 한국 음식과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집에서는 한국 옷, 특히 여름철의 모시 적삼을 즐겨 입게 됐고, 1966년부터 대전 교구 주교로 내려갔다.
한국 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이 느낀 것은 한국민의 풍부한 해학성이다. 한국인은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웃음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이다. 나는 종교를 논하는데도 해학이 없는 종교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이다.
현재 한국의 불교는 20년 전에 비해 크게 성장됐으며 이제 불교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왔고 교세도 크게 확장됐는데 나는 한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앞으로 더욱 한국에서 불교가 번창하기를 빈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대전의 시민들은 전혀 자기 고장에 대한 긍지가 없는 것을 봤는데 이는 지역사회 발전의 큰 저해 요인이 된다고 본다.
한국을 떠나면서 가장 아쉽고 그리운 것은 진귀한 책들이 묻힌 고 서점들이 없어지는 것과 지방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서울로 이동되거나 없어지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 요로에 여러 번 얘기했으나 그때마다 고맙다고만 얘기할 뿐 유감스럽게도 실천에 옮기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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