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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억 원의 부정 대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 개인이 금녹 통상·남도 산업 등 18개 기업체를 차려 놓고 74억 원이나 되는 자금을 부정 대출로 받아 낸 사건은 그 규모로 보거나 조직성으로 보거나 결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8개 은행에서 버젓이 나갈 수 있었는가, 또 1백21장이나 되는 변조 신용장이 어째서 하나도 문제되지 않고 2년여에 걸쳐 무사하게 통과될 수 있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혹을 명백히 해명할 수 있어야만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에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과연 실무자 급의 「미스」로 그러한 거액의 대출금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8개나 되는 은행이 하나같이 부정 융자 혐의에 말려들 만큼, 이들 기업은 역사와 관록을 가진 기업들이었던가. 2년 유여의 짧은 기간 내에 74억원이라는 거액이 수출 금융으로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수출 실적은 고작 1천8백만 원어치밖에 안됐었으니 어찌하여 확인도 없이 계속 자금이 나갈 수 있었는가.
사건에 말려든 은행의 임원이나, 행원들이 과연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입장에서 그처럼 많은 금액을 부족한 담보로 내줄 만큼 무신경할 수 있었던가. 그 하나 하나가 참으로 이해키 어려운 의문이다.
이 모든 의문점들에 관한 분명한 납득이 갈 수 있을 만큼 사건의 전모가 속속들이 파헤쳐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 보다 더 큰 부정 대출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부정 대출과 얽혀 있는 이상의 모든 요인들을 분명히 밝혀 낸다면 금융을 근본적으로 정상화시킬 수 있는 좋은 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보는 사건 수습의 정도는 다음과 같은 방향의 것이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우선 사건을 표면에 나타난 결과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그 배경과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 주어야 하겠다. 은행원이 순박해서 속은 것이라 덮어두기에는 관련 은행이 너무나 많고 또 그 대출 금액이나 부정 수법이 너무도 대담무쌍한 정은 납득키 어렵다. 더욱이 부정 대출의 장본인은 과거에도 큰 금융 부정 사건과 관련이 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었으며, 금융기관 간부들이 이를 알고서도 그러한 여신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결코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 업체의 대출에 담보를 제공한 사람들이 과연 선의의 제공자들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담보 제공자와 채무자는 대개의 경우, 이해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이 점을 깊이 추궁한다면 사건의 윤곽은 더욱 뚜렷하게 밝혀질 것이 틀림없다.
또, 중소 기업 은행에는 이들이 융자를 받기 위해 뇌물을 제공했다 하는데, 다른 은행에는 어찌하여 그러한 일이 전혀 없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은행원의 눈을 가릴 수 있을 만큼 모종의 마취 작용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수출도 이행되지 않고 있는 1백여 장의 변조 신용장이 그렇게 여러 번 그대로 통과될 수 있었겠는가.
사리가 그러하다면 이 사건을 놓고서 금융 당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무적 절차의 개선이라는 수습 방법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특별 감사나 감사의 권한 확대로 대처해서 그러한 부정의 재발을 막겠다고 판단하는 것도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은 금융 기관의 자주성이라는 기반 자체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과 금용 기관의 인적 구조의 허점에 있는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금융기관이 상업「베이스」에 따라 운영될 수 있다면, 그리고 금융 기관 임직원이 오직 양심과 경제적 척도에 따라서 여신을 할 수 있다면, 이번 사건처럼 엄청난 부정이, 그것도 다수 은행에 걸쳐서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금융의 중립성·자율성이라는 제도적 장치의 개선과 가치 모순을 상실해서 세파에 물든 인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혁파한다는 청소 작업이 단행되어야만 금융은 비로소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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