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영웅 가리자" 이세돌·구리 세기의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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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강자가 사라지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세계 바둑에서 마지막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 기사는 누구인가. 이세돌 대 구리의 10번기가 26일 시작된다. [사진 한국기원]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10번기’가 26일 베이징 캉위엔루이팅 호텔에서 개막된다. 2국은 상하이, 3국은 쓰촨성 청두, 4국은 한국에서 열린다. 샹그릴라, 티베트의 라싸도 가고 구리의 고향인 충칭과 홍콩도 간다. 이세돌과 구리는 올 한 해 동안 매달 5일 정도는 이 대국을 위해 비워 둬야 한다. 승자에게 돌아갈 상금은 500만 위안(8억7000만원). 패자에겐 20만 위안만 주어진다. 길고 힘든 승부다.

 이 대회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 영웅이 진검으로 격돌하는 세기의 대결’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세돌과 구리가 지금 ‘세계 최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이세돌은 한국랭킹 3위, 구리는 중국랭킹 4위다) ‘세기의 대결’이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둘은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일인자’였고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이세돌은 공식전에서 구리와 16승1무17패를 기록하고 있다. 비공식을 포함하면 18승1무17패다. 세계대회선 이세돌 쪽이 16회 우승해 구리(7회)를 크게 앞서고 있지만 두 기사의 전적은 그야말로 백중세다. 83년생 동갑인 데다 95년 나란히 프로가 됐고 각각 한국과 중국에서 무적으로 군림했다. 이런 라이벌은 앞으로 다시 등장하기 어렵다.

 이세돌과 구리는 ‘30세’를 넘기며 후진들의 가파른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10번기를 앞에 두고 구리는 몽백합배, 이세돌은 삼성화재배 결승에 나란히 올랐다. 바둑팬들은 두 기사 모두 승리해 한 시대를 지배해 온 두 기사의 10번기가 최강자의 대결로 평가받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구리는 17세 미위팅에게 졌고 이세돌은 21세 탕웨이싱에게 졌다. ‘착각’이 패배의 주범이었다. ‘착각은 어쩔 수 없는 세월 탓’이라고는 하나 이세돌과 구리가 그런 어린 기사들에게 패배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승부세계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굴러가는 법인가.

 그렇게 이세돌과 구리는 무관이 됐다. 이세돌은 국수전에서도 조한승에게 지며 결승전에서 내리 6연패했다. 승부사 이세돌에겐 일생 처음 맛보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10번기는 다가오는데 두 기사는 마치 깊은 겨울잠에 빠져든 듯 보였다. 하지만 이세돌과 구리는 바둑영웅답게 외마디 비명 같은 마지막 투혼을 보여줬다.

 지난 12일 구리 9단이 중국의 용성배 결승에 올라 리저 6단을 2대1로 격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1년여 만에 힘겹게 무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2일 이세돌 역시 KBS바둑왕전에서 한국1위 박정환 9단을 2대1로 격파하고 무관에서 벗어났다. 10번기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결과였다. 비장하기조차 한 이 승리가 10번기를 향한 이세돌의 천근 같은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줬다.

 10번기는 제한시간이 4시간, 덤은 3과4분의3집(한국의 7집반)이다. 4시간이란 긴 시간은 시간을 더 많이 쓰는 이세돌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공배까지 계산하는 중국룰이 적용되고 거의 모든 대국장소가 중국이라는 점은 마이너스 요인이다.

 “구리는 내 바둑인생의 가장 큰 선물. 지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이세돌은 말했다. 싸우다가 친구가 된 두 기사의 명승부를 기대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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