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전쟁 경보] 1. 일본·중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주요국들이 이라크전을 앞두고 비상경제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혹시라도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가뜩이나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자국 경제가 아예 회생불능 상태로 빠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다. 특파원들의 현지 취재로 각국의 움직임을 알아본다.(편집자)

일본.중국.홍콩 등 아시아 주요국들이 중동지역의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비상경제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 원유 생산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유가 폭등에 따른 제조업 가동률 저하에 대비해 저유소 건설 등 석유 수급책 마련에 나섰다. 각국 정부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진작 대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일본=증시 폭락에 엔고까지 겹쳐 걱정이 태산인 일본 경제에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라크전 발발로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유가가 급등할 것에 대비해 이미 각종 비상대책안을 마련한 상태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바로 일본은행이 시중에 1조~1조5조엔 가량의 돈을 더 풀고, 증시에 상장돼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를 대거 사들여 금융시장의 안정을 꾀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또 엔화 가치가 급속하게 상승할 경우 수출 기업에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일본은행이 수시로 시장에 개입하기로 방침을 정해 놓았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라크전이 시작되면 유가 안정을 위해 국가 비축 석유를 시장에 풀겠다고 17일 밝혔다.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국가 비축분과 민간 비축분을 합해 지난해 말 기준 5억5천만배럴로 1백71일분이나 된다. 미국(82일).독일(93일).영국(65일).한국(43일)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이다.

1991년 걸프전 때 일 정부는 민간 비축분만을 시장에 풀었다. 게다가 "일본의 휘발유 값은 최근 6개월 사이 ℓ당 약 1엔(약 10원) 가량 올랐을 뿐 거의 변동이 없는 매우 안정된 상태다.

그런데도 정부가 굳이 국가 비축분을 풀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행여 초기 대응이 늦어 유가를 잡지 못할 경우 가뜩이나 위태로운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민간 비축분을 풀 경우 석유가 실제 시장에 풀리는 것은 기업들의 사정에 따라 상당 기간 늦춰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신속히 시장에 돌릴 수 있는 국가 비축분을 풀어 국내 유가를 확실히 잡겠다는 게 일본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정부 못지 않게 이라크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일본 기업들이다. 특히 이라크 인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유럽에 물건을 수출하는 기업들의 경우 물류에 차질이 올 것을 걱정하고 있다.

소니.도요타.닛산.NEC 등은 일단 전쟁이 나면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통해 수송하던 주요 부품들을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거쳐 가거나 항공편으로 운송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물류회사인 닛산은 중동 지역을 우회해 시베리아 철도를 통한 일본~유럽 루트를 활용하기로 했다.

한편 이라크전이 끝난 후의 복구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도 상당수다. 특히 미쓰이물산.스미토모상사 등 이미 오래 전부터 이라크에 상당한 '뿌리'를 내린 종합상사와 건설.자동차 회사들은 91년 걸프전 이후의 복구작업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등 준비작업에 여념이 없다.

중국=이라크 전쟁 우려로 '제조업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석유 수급 대책에 비상이 걸렸다. 중국은 올 들어 석유 비축을 본격적으로 늘리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등 '석유 안보'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92년까지 석유를 수출했으나 급속한 산업화로 소비량이 많아져 지난해 원유 6천9백41만t, 석유제품 2천34만t을 수입했다. 세계 3위의 원유 수입국이 된 것이다. 특히 중동 의존도는 60%선에 이른다.

원자바오 총리는 이라크 위기가 고조됐던 지난 1월 하순부터 "유가 파동에 대비해 정부.민간 차원에서 '석유 안보 전략'을 치밀하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 차원에선 7일분에 불과한 석유 비축량을 30일분으로 늘리기 위해 15억7천만달러를 들여 6백90만t(약 5천만배럴)의 저유소 건설에 들어갔다.

한편 중국은 이라크 사태가 외국인 투자 유치 측면에선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는 과거 9.11 테러사건이 터진 뒤 투자 위험도가 낮다는 점을 평가받아 외국인 투자가 급증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이 장기화될 경우 이 같은 장점을 최대한 홍보해 미국과 유럽 자금을 끌어들인다는 사업 복안을 세웠다.

홍콩=금융 중심지인 홍콩에선 석유 수급보다 국제 금융시장과 핫머니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 유가 상승으로 홍콩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당초 예상했던 3.5%에서 1%포인트 가량 낮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주가.부동산 값 하락으로 불황을 겪고 있는 홍콩 경제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는 얘기다.

둥젠화 행정장관은 이라크 사태로 항셍지수가 98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자 '긴급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직접적인 시장 개입을 하지 않지만 국제 환투기 세력의 홍콩달러화에 대한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서다.

홍콩.도쿄=이양수.김현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