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와 건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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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민이 정부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명심하여 민의에 따르는 정치를 하겠다.』
이 말은 지난 3일 개각에 의해 재 취임한 김 총리의 제1성이었다. 김 총리의 이 같은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민주정치란 곧 민의에 따른 정치를 뜻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자명한 것을 총리의 입을 통해 재확인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 동안 정부가 민의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강권으로써 임하여 왔다는 것을 반성하고, 그 시정을 약속했다는 점에서는 기대를 걸게 하는 발언이었다 할 것이다.
정부의 이 같은 태도표명이 있었기 때문에서인지 최근에 들어 여러 형태의 대정부 건의들이 답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다수국민의 공감을 살만한 건설적인 제안이 적지 않다.

<국회의 대정부 건의>
그 몇 가지만을 열거한다 하더라도 우선 국회가 채택한 대정부 건의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정부가 최근 내각을 개편하고, 구속학생의 석방과 모든 학내처벌을 백지화하도록 조치한 일련의 처사를 이 건의에 따른 것으로 인정하고, 이것이 곧 민의에 따르는 정치의 정도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동안 정부의 독선적 행정에 대해서는 여당인 공화당의원들조차 성토를 벌였을 정도이니, 정부가 민의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이처럼 신속하게 대응한다면 국내정국의 경색은 크게 풀릴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김 총리가 71년 취임당시부터 공약했던「대화행정」이 향후 민의 행정을 이끌어 나가는 주요지침이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민주행정의 정도는 건의·진정 등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정부가 능동적으로 민의와 여론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것을 행정에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하물며 국민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로서의 청원권을 행사하여 건의나 진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묵살하거나 무시하는 경우, 국민대중은 소외감에 싸여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최근 국내 각계각층으로부터 다양한 대 정부건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국민의 대정부 불신이 그만큼 고개를 숙일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 도리어 기뻐해야 할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그 가운데서도 최근에 제출된 이대 교수위의 건의라든지, 대한변협의 건의는 많은 지성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를 지녔다.

<이대 교수위의 건의>
이대 교수위의 건의는 학생들의 여러 결의문 속에 담겨진 요망사항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면서 특히『그 실천과정도 공개적으로 마음놓고 보고, 듣고, 말하고, 쓰고, 읽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건의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도록 요망했었다. 이는 비단 이화여대의 교수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사랑하는 모든 교육자와 지성인의 소리를 대변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 건의는 어린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시위운동을 벌인 것은 그들의 스승인 교수들
이 보고도 못본 체, 듣고도 못들은 체, 입이 있어도 할말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혈기방장한 학우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지성인들을 대변한 것이었다는 상황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속 학우들이 석방되고 징계학생들이 해제되어 학원에는 약간의 훈풍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이번 조치가 현하 정국을 근본적으로 가라앉히는 해결책으로까지 발전되기 위해서는 서정쇄신을 위한 보다 과감한 자세전환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에 앞서서 교육자·언론인·지식인들이 소신있게 그 할만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만 학원동요의 불씨는 완전히 사그러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학생이 진정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길은 결국 지식인 일반
에게 널리 사회참여를 권장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정부시책을 비판할 자유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정부시책에 대하여 비판할 자유가 없는 경우에는 스승이나 성인들이 학우들에게 그것을 찬성하고, 설득케 할 자유도 있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대한변협·노총의 건의>
최근의 건의 중에서 또 한가지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한변협과 한국노총의 건의이다. 7일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면서 그 방법으로서 최저임금제의 도입을 건의한 것이다. 산업의 역군인 근로자의 복지와 건강 없이는 우리의 공업 입국에의 꿈도 결국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 우려가 없지 않다. 대한노총의 건의가 없다 하더라도 정부가 근로의 생존권보장 요구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가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편 대한변협도 같은 날 형사재판의『운영쇄신에 관한 건의』를 제출, 이른바「날치기재판」·「원님재판」등의 폐단을 없앨 것과 고문이나 불법구금이 없도록 시정을 요구했다.
대한변협이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구체적으로 피의자인권의 유린 사례를 들어가면서 그 시정을 요구한 것은 그 동안의 실태가 너무도 목불인견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문금지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헌법상 명문규정이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리의 하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고문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조차 이를 못 본체하고 있으며, 각종 이유로 공정하게 재판 받을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명과 법치주의를 무색케 하는 감이 없지 않다.
이 같은 상황아래 제25회「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이하여 신임 이 법무가『세계인권선언이 지향하는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날이 빨리 도래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신임 김 검찰총장이『검찰권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격하겠다』고 한 것은 국민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말과 같이 앞으로 이 나라에서는 온갖 형태의 고문이나 가혹행위, 또는 일절의 불법구금사례가 근절되기를 요망하며, 또 그 실천여부를 예의 주시할 것이다.

<인권 선언일의 다짐>
정부는 개각과 학께 심기일전하여 보이지 않는 국민의 가려움을 긁어 주고, 들리지 않는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 이를 해결해 주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절차를 갖추어 제출된 국민의 건의나 진정들은 이를 신속·과감하게 처리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가 민의에 따른 행정을 펴 나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여건이 조성된다면 누가 권하지 않더라도 지식인들은 발벗고 나서 조국전진의 향도가 되고 민족의 중흥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자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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