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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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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부들이 서울 서초동에 있는 여성부를 찾아갔다. 여성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들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설립됐다는데 주부들에게 여성부는 여전히 멀다. 언론 보도를 보면 여성부는 늘 호주제 폐지.성매매 방지법 개정 등 거창하고 대단한 일에 무척 바빠 보였다.

중앙일보 주부통신원들은 지난 12일 지은희(池銀姬.55) 신임 여성부 장관을 만났다. 장관은 김혜영(42).이돈아(36).윤조현(30).홍정희(45) 씨 등 4명의 주부와 자리를 함께 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켰고 시부모와의 관계는 어떻고 하는 '찜질방식 수다'부터 여성 현안에 대한 열띤 토론까지 이어졌다.

예정됐던 한시간을 훌쩍 넘겼다. 다음 일정에 쫓긴 비서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인터뷰 진행은 문경란 본지 여성전문기자가 맡았다.

-윤조현:언론에선 장관님을 투사처럼 묘사했던데.인상은 안 그렇네요.

-장관:여성운동이란 게 부드럽게 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늘 싸워야 했지요. 운동 현장에서 20년을 넘기다 보니 이미지가 그렇게 굳었나 봐요. 사실 고등학교 때 별명은 '애교부장'이었답니다('장관용'으로 최근에 샀다는 분홍색 투피스 정장이 눈길을 끈다).

-홍정희:어떻게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

-장관:대학(이화여대)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그곳에서 여성 근로자들의 어려운 삶을 지켜보게 됐습니다. 그 뒤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代母)인 이효재 교수 아래에서 배웠습니다. 그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어요. 그뒤로 외길을 걸었습니다.

-이돈아: 부부 간에 다툼은 없었나요. 시댁 눈치도 보였을텐데.

-장관:시어머니가 처음부터 저를 굉장히 존중해 주셨어요. 남편도 이해해줬고요. 물론 부부간에 사소한 다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모두 웃음) 그래도 잘 살고 있습니다(누군가 "정말 시집 잘 갔네요"라고 하자 폭소가 터졌다. 남편 주영길씨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김혜영:따님이 한분 있다고 들었는데. 아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없었나요.

-장관:부부 모두 딸을 원했어요. 하지만 모르죠. 남편이 겉으로 표시는 안했어도 속으론 어땠는지.

-김:따님 교육은 어떻게 했나요? 과외는 시키셨겠죠?

-장관:친정 어머니가 주로 키우셨죠. 다른 엄마처럼 늘 함께 하진 못했어요. 대신 남 다르게 키웠습니다. 자장가도 '우리 아기 착한 아기'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우리 아기 굳센 아기'라고 불렀지요. 인형도, 공주님 얘기가 나오는 동화책도 안 사줬어요. 대신 나무 쌓기 같은 중성적인 장난감을 쥐어 줬지요. 굳세고 당당한 딸이 되길 바랐어요. 과외는 한번도 안 시켰어요. 영어.수학 학원에 몇달씩 다닌 적은 있지만. 모녀간에도 서로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장 옆에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엄마가 하고 있는 일을 딸이 믿고 있다면, 그리고 엄마도 마찬가지라면 충분한 거라고 생각해요.

-윤:많은 엄마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어요. 장관님처럼 주위에서 전적으로 도와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말이지요.

-장관:영.유아 보육(保育)부터 자녀 교육까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부모와 국가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육 문제는 여성부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보건복지부.교육인적자원부.여성부 등이 참여해 종합 대책을 마련할 겁니다. '여성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죠.

-김:여성부가 행복해야 모든 정부 부처가 행복해진다는 얘기죠?(모두 웃음)

-이:노인 문제는 가장 심각한 가정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장관:맞습니다. 치매 노인이 한 분 계시면 온 집안이 엉망이 됩니다. 우리 관습상 복지시설에 모시기는 꺼려지니까 집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지요.돌보는 일이 결국 주부 개인의 책임이 됩니다. 노인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홍:기존의 여성부 사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관:어휴,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 여성부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여성부가 성희롱 피해 여성을 구제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성희롱 판결부'란 비판도 좀 받았어요. 하지만 성적 수치심을 준다면 행동뿐 아니라 말 한 마디도 문제가 된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됐잖아요. 여성부 활동의 큰 성과 중 하나겠죠.

-홍:성매매 문제가 심각하죠?

-장관:성매매는 부부간 문제이기도 해요. 주부들도 딴 세상 얘기라고 생각하면 안되요. 성매매를 하는 남성이 우리의 남편이고 아들이잖아요. 성을 사는 데 익숙해지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어요? 성매매는 가정의 문제고 부부 문제예요.

-김:사실 전업주부들은 여성부에 거리감을 느낍니다. 여성 운동의 거창한 구호도 잘 와닿지 않아요.

-장관:아줌마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 '섬'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줌마 스스로 깨우치는 게 중요합니다. 돈을 벌어오느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사회 생활을 판단해선 안됩니다. 부엌에서 세계가 보입니다. 전업주부에서 '사회적 주부'로 의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윤:주부를 위한 직업교육 기관은 주위에 많이 있어요. 하지만 교육 내용도 부실해 보이고 막상 재취업에도 별로 도움이 안돼요.

-장관:여성부에서 운영하는 여성인력개발센터 얘기군요. 저도 직접 프로그램을 확인해 봤어요. 아주 형편없진 않던데. 물론 부족한 게 많겠죠. 많은 관심을 갖겠습니다.

-홍:여성부가 아줌마를 위해서 하는 일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의 대다수는 집에서 살림 걱정하는 주부잖아요.

-장관:주부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주부와 가까이 하는 여성부를 만들겠습니다. 앞으로 관련 대책을 세우겠습니다(장관은 옆에 있던 조성은 공보관에게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지금까지의 여성부 활동이 성매매 피해 여성이나 저소득 여성 등에 중점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주부와도 의기투합하겠습니다.

주부들은 여성부를 위해 뭔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관은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며 "자주 이런 자리를 갖고 싶다"고 마무리했다.

정리=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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