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앞 식당 30차례 대장정 … 사장·직원간 불신 해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① 오비맥주 장인수 사장


기업을 둘러싼 국내외 변수가 변화무쌍합니다. 안갯속에서 살길을 찾아내야 하는 기업의 어려움도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돌파구를 열어야 할까요? 그 답을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은 기업들이 있습니다. 바로 현장입니다. 기업 전쟁의 최전선에서 위기의 싹을 찾아내 도려내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기업을 찾아가봤습니다. 고뇌에 찬 최고경영자(CEO)의 육성도 들어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네 오빠.” 사장이 선창을 하자 30명 남자 직원들 틈에 앉은 여직원 몇이 화답했다. 이어서 남자 직원들이 “네 형님” 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2012년 7월부터 12월 말까지 전국의 오비맥주 공장 세 곳 주변 식당에서 30차례 벌어진 광경이다. 공장별로 일과 후에 열린 생산직원 간담회. 간담회가 열릴 때마다 몇몇 직원은 장인수(58ㆍ사진) 사장과 인증샷을 찍었다. ‘조폭식’ 건배사는 장 사장이 제안한 것이다. 전달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그는 30명씩 묶어 이천·청원·광주 공장 전체 생산직 근로자 750여 명에게서 현장의 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공장 투어 계획을 발표했다. 6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임원들이 강행군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공장마다 구내식당은 물론 별도의 맥주 시음장을 갖췄지만 그는 공장 앞 식당들을 ‘순례’했다. ‘영내’에서 회식을 하면 10만원짜리 출장 뷔페를 불러도 ‘짬밥’으로 여기는 현장의 정서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여러분과 안면을 트려고 왔다”고 긴장을 풀어준 뒤 막내부터 일으켜 세워 질문·건의를 받고 건배 제의를 하게 했다. 쭈뼛쭈뼛하던 직원들이 이런저런 건의를 쏟아냈다. 그는 중간중간 답변을 하고 수용할 만한 건의는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3시간 반 이상 걸린 간담회를 마친 후 그는 “현장에서 뼈가 굵은 장인답게 회사를 위해 장인정신을 발휘해 달라”고 당부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안아줬다.

총 30회의 간담회에서 나온 441건의 건의 중 400여 건이 채택됐다. 기계의 노후화를 피부로 느낀 직원들의 건의에 따라 맥주 주입기와 살균기가 교체됐다. 한 직원의 건의로 회사 홍보용 휴대전화 컬러링을 제작해 전 구성원에게 보급했다. 공장 인근에 있는 자신의 출신학교를 회사에서 지원해 달라는 청원공장 직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학교에 필요한 시설을 기증하기도 했다. 20~30년 근무한 고참 직원들이 사장과의 이런 회식 자리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한데 어울려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인원이 30명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여름에 시작한 생산직원과의 간담회는 겨울이 돼서야 끝났다. 현장을 누비면서 그는 오비가 15년째 ‘2등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도 찾아냈다. 2010년 그가 경쟁사인 하이트진로를 떠나 오비의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돼 왔을 때 오비는 2등이면서도 늘 쫓겼다. 이 때문에 월말이면 출고 실적을 부풀리느라 오비의 간판 제품인 카스를 도매사 창고에 쌓아두는 ‘밀어내기식 영업’에 매달렸다. 이로 인해 유통기간이 3~6개월로 길어졌다. 카스는 그가 진로에서 일할 때 처음 선보인 진로 제품이었다(훗날 카스를 만들던 진로쿠어스가 오비에 합병됐다). 맥주는 발효식 술이라 공장에서 막 나왔을 때 가장 맛이 좋다. 특히 비열처리맥주인 카스의 차별성은 신선한 맛이다. 진로 지점장 시절 그는 “카스는 야채와 같은 신선 식품”이라고 고객을 설득했었다. 그런데 밀어내기 영업 탓에 유통기간이 길어지면서 카스의 생명인 신선한 맛을 잃었다.

그는 바로 CEO와 대주주를 설득했다. “잘못된 영업 관행을 바로잡고 재고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할 테니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에도 시장 판도에 변화가 없으면 사표를 쓰겠다는 배수진도 쳤다. 월말 출고분을 줄이는 대신 월초에 집중적으로 출고시킨 후 영업사원들을 독려했다. 반신반의하던 직원들도 30차례 이어진 그의 공장 앞 식당 대장정이 이어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사장의 확고한 뜻을 직접 접한 덕분이었다. 밀어내기를 중단하니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건 당연했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나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떨어졌던 시장점유율이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유통기간을 단축했을 뿐인데 소비자들 사이에서 “카스의 제조 레시피가 바뀌었느냐”는 말이 나왔다. 카스의 신선한 맛을 살린 덕분이었다. 요즘 출고되는 카스의 유통기간은 대부분 1개월 미만이다. 그는 “카스의 신선도를 유지한 결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라며 “사실 제품 자체의 고유한 경쟁력을 살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제품의 선순환이 이루어지자 패배의식에 젖었던 직원들도 자신감을 회복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30차례의 공장 앞 식당 대장정을 통해 그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1980년대 후반 조선맥주(하이트의 전신)와의 격차를 7대3까지 벌린 시장 지배자 오비의 자존심도 회복됐다. 2011년 8월 카스 신선도 유지 전략 덕에 전세가 재역전됐기 때문이다. 그가 영입된 지 1년7개월 만이었다. 부임 첫해 그의 차 주행거리는 7만km에 달했다. 지난해 4월 오비의 시장점유율은 59%를 기록했다(주류산업협회는 그 후로 시장점유율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필재 객원기자 jelpj@hanmail.net

중앙SUNDAY 구독신청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