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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띄우는 편지 ⑤·끝 화가 사석원 - 아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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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석원씨가 성년이 된 아들에게 부친 ‘소년과 장미꽃을 실은 말’. 청마(靑馬)의 해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누리라”고 했다. 50㎝×35㎝, 종이에 아크릴.

아들아, 주민등록증이 나왔다고 통지가 왔더라. 축하한다. 성인이 되는 만큼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이 많아졌을 것 같구나. 마침 새해도 시작되었기에 아빠로서, 또 선배 남자로서 전하고 싶은 몇 가지 얘기를 편지로 띄운다.

 아들아, 우선 여자에 관해 얘기하고 싶구나. 여자는 어쩌면 전 생애 내내 씨름해야 할 남자들의 숙명적인 과제란다. 너도 아마 지금쯤이면 여자에 관한 상념들로 꽤나 머릿속이 복잡하고 나름 다양한 전략을 구상하면서 기대감으로 들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몽룡이는 너보다 어린 나이에 이미 춘향이와 큰일을 치렀지 않느냐. 운전을 배우려면 운전교습소에 가야 하겠지. 여자를 알려면 어딜 가야 할까. 아빠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보다는 아빠가 천 배는 경험이 많으니 귀중한 조언을 딱 한 가지만 하겠다.

술은 좋은 친구 … 파멸로 이끌 수도 있어

사석원

 아들아, 성형수술에 빠진 여자들을 멀리해라. 미와 치료를 위한 적절한 노력은 환영하지만 광적인 성형 추종과 중독은 자기비하이고 인간성 모독이란다. 오로지 성적인 매력을 위해서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다니. 자신의 원형은 잊어달라 하고 스스로 미워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느냐.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아, 술에 대해서도 얘기하련다. 술은 슬픈 상처에 포로가 되어 있으면 친구처럼 다가와 부드럽게 포옹해주고, 푹신한 베개같이 피곤을 덜어주고, 싫은 기억을 잊게 해주는 명약이다. 술은 믿을 수 없을 지경으로 큰 용기를 주어 영웅을 만들기도 하고 낭만적인 시인이 되게도 하는, 그야말로 신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러나 아들아, 술은 또한 사람을 순식간에 파멸에 이르게도 한단다. 축제와 재앙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어디로 갈까 기웃거리는 것이 술이란 놈이다. 노인처럼 병들게도 하고 영혼을 죽일 수도 있지. 가급적 천천히 술을 마셔라. 특히 첫째 잔, 둘째 잔, 셋째 잔 까지는 최대한 느리게 마셔라. 그러면 영혼이 도망치는 허망한 상태까지 가지 않는 데엔 도움이 될 것이다.

 가정은 영원한 피난처지만 식구가 정겹게 같이 있을 때나 그런 것이고 가족이라도 떨어져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는 법. 안개 기둥 같이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단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대가가 세상에 무엇이 있을까. 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써라. 습관적으로 그래라. 습관은 인생을 지배하는 무서운 원리란다.

가족은 피난처 … 같이 시간 보내려 애써라

 아들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거라. 일자리가 없어 요즘 아우성이다. 학창 시절 공부 좀 했다는 아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하지. 그런데 생각해 봐라. 왜 모두 똑같은 방향과 방법으로만 해답을 찾고 있을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어떻게 모두 같을 수 있을까. 1등을 하려 말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원시림을 개척해라. 무주공산을 차지해라.

 평생직업은 노동과 유희가 구분되지 않는, 일이기도 하지만 즐거운 놀이같이 재미나야 한다. 정말 하고 싶었던 꿈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생 지루하지 않고 세파에 출렁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뚜벅뚜벅 자기 걸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길이 어디냐고? 그 길을 찾는 것은 네 몫이야. 누구도 대신 찾아줄 수 없단다. 우선은 네가 원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냉철히 생각해 봐야겠지. 선택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니까. 너의 세대에는 아마 100세까지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니 젊을 때 몇 년의 방황은 오히려 인생에선 큰 재산임이 틀림없다. 너에게 절실한 일이 무엇인지 남을 의식하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긴 호흡으로 찾아보거라.

 아들아, 남을 존중해라. 그리하여 그들이 너를 존중하게 해라. 그것이 예술적 삶이란다. 예술적 삶이란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자주 찾아가 예술의 향기를 느끼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남을 존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단다. 그 사람의 예술적 견해, 정치적 신념, 종교적 믿음 등 인간의 자유에 대한 광범위한 포용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도 마찬가지야. 자연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 존중의 동의어는 겸손이고 반대어는 오만과 편견이란다.

너에겐 유산 대신 아빠와의 추억 남기마

 아들아, 너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아빠가 너에게 물려줄 물질적 유산은 별로 없다. 아빠가 번 돈과 벌 돈은 엄마랑 다 쓰고 이번 생을 마칠 작정이다. 자립하는 재미를 너에게서 뺏고 싶지 않다. 돈이란 때론 짐이 되고 화를 자초하는 요물이 되기에 그렇단다.

 대신 난 너에게 ‘추억’이라는 유산을 되도록 많이 물려줄 계획이다. 어린 너랑 단둘이서 몇 개월씩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오지를 헤맨 것을 너는 잘 기억하고 있더라. 고맙다. 그것이 아빠의 유산이다. 언젠가는 아빠도 너도 세상에서 사라진다. 우린 유한한 존재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절박한 각오로 즐겨야 한다.

 그렇지만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즐기며 행복을 나눠야 한다. 혼자만 즐기는 것은 타락일 뿐, 인생은 더불어 즐길 때 진정 황홀하게 아름답단다.

 이제 너희의 세상이 펼쳐 지려 한다. 미소가 그윽한 아들아, 사랑한다.

화가 사석원

◆사석원=1960년 서울 생. 동국대와 파리8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틈틈이 여행한 기록을 풍류 넘치는 그림과 글로 남겼다. 화문집 『막걸리 연가』 『황홀한 쿠바』 『꽃을 씹는 당나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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