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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제5화 북해도 한인 위령탑의 엘레지 (2)|제2장 피맺힌 사연들의 흔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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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해도에서 당한 한인들의 고초를 무슨 동정이나 하는 것처럼 입에 담고,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을 달랜다고 말로만 떠들지들 마십시오.』
한필용 옹은 대뜸 으름장부터 놓으면서 기자의 반응을 살피는 듯 했다. 민단 함관시 지부 사무장 김상록씨 (경남 의령 출신·51)의 자택이기도한 불고기 집 고사원에서 만난 한옹의 얼굴엔 노기가 등등했다.
『민단 간부다, 유지다 하는 친구들은 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당시의 처참했던 얘기를 과장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하지요. 그렇지만 그들 자신은 물론, 본국의 높은 양반들도 여기 버려진 희생자들의 넋을 진심으로 위로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말로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면 단 줄 압니까. 여기 일본인 가운데서도 과거의 죄책을 느끼고 돈 써가며 유골을 수습한다, 과거장을 만든다해서 명단과 출신 본적지까지 밝혀놨어도 본국에선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무슨 창피입니까. 』

<희생자 미끼로 사기도>
말끝마다 노기가 서려 있다.
소화원년 (1926), 이 땅에 건너와 이 고장에서 48년간 직접 「도까다」 (토목 공사에 종사하는 막벌이 노동자) 판에 종사하면서 뼈를 굳힌 그답게 그의 생김새는 여간 만만치 않다. 그는 태평양전쟁 중의 저 악몽과 같은 한국인 수난 광경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산 역사의 증인인 것이다.
『보아하니, 선생은 적나라한 진실을 꼭 본국 사람들한테 전해줄 것 같아 굳이 여기 나왔다』고 전제하고, 8·15 해방 직후부터 그가 느껴온 만가지 소회를 한꺼번에 다 털어놓으려 했다.
해방 직후 이미 상당한 자산을 모았던 그 앞에 맨 처음 본국으로부터 왔다고 나타난 두 사나이 (홍모·배모란 변호사, 특히 이름을 감춤)는 멀쩡한 사기꾼이었다고 했다. 한국인 노무자들의 본국 귀환과 유골 수습을 미군 정청으로부터 위탁받고 왔다는 이 사나이들은 자기에게서도 거액의 돈을 거두고서는 줄행랑을 놨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위령제다, 위령탑 건립이다 하여 제법 많은 돈을 거둬 법석을 떨기도 하지만, 그 희생자들의 고혼을 정말로 달래어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은 본 일이 없다고 극언하기도 했다.
이곳 입대갑과 그 밖의 북해도 전역에 걸쳐서 벌어졌던 한국인 노무자들의 피맺힌 사연들에 관해서 그는 특히 그 죄과는 일인들 못지 않게 이곳에까지 건너와 그 앞잡이노릇을 하던 한국인들에게도 있다고 주목할만한 말을 했다.
그의 말은 거침없이 계속됐다.
『전쟁이 장기화해감에 따라서 북해도는 날로 살벌한 군수 기지로 돼 갔었소. 태평양전쟁이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도내에서도 유수한 토건 회사를 자영하게된 내 회사에도 날로 일감이 늘어나 나는 되도록 같은 동포인 한인노무자들을 쓰기로 했었소. 나로 말하면 그때까지 그 지독한 왜놈들 틈에 끼여 20여년을 부대끼던 끝에 겨우 기반을 잡았을 매가 아니겠소. 동포들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오지에서 도망쳐 나온 노무자들을 감싸주려고 무척 애를 먹었을 때요.

<군수 기지화한 북해도>
그렇지만 전쟁 경기에 한몫 보려고 악머구리 떼처럼 청부업자들이 밀려들던 당시 북해도엔 한인이 아니라도 동포애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바라지도 못할 만큼 살벌한 분위기만이 판을 치고있었던 것이요.』한 옹은 크게 한숨을 몰아쉬면서 그 당시의 악몽을 회상하는 듯, 더욱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북해도는 미구에 있을 상륙 작전에라도 대비하려는 듯 갑자기 요새를 만든다, 포대를 싼다해서 광기를 부렸습니다. 석탄과 철광 채굴을 독촉하고 새로 철로를 놓느라고 사람의 생명의 안전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마구 볶아대던 때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일손이 있어야 말이죠. 일본 본토의 젊은이들은 이미 씨가 마를 만큼 다 동원돼 나간 뒤가 아닙니까.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과 대만, 그리고 만주에서까지 노동력을 붙잡아 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때,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일종의 인간 수렵의 면장을 주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노동력을 외지에서 끌어오게 한 것입니다.

<「다꼬베야」의 노예 생활>
원래, 「도까다」판이란 살인조차도 예사처럼 해치우는 곳인데, 여기 정부로부터 면허장을 받은 셈이니 말은 해서 다 뭣하겠습니까. 남녀 할 것 없이 쓸만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쯤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고, 일단 사들인 인간 노예들은 이른바 「다꼬베야」 (소부옥=낙지잡이 통처럼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제물로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도록, 이를테면 철저한 감시 조직하의 노동자 수용소를 말함)에 가둬두고 굶기든, 추위에 열어죽든 상관없이 마구 부려먹는 사태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것이요.』
『입대갑에서 죽어간 한국인 위안부들의 비극은 이런 분위기 아래서 저질러진 것입니다. 이른바 정신대란 미명아래 끌려온 한국소녀들은 이 땅에 닿자마자 창녀로 팔려, 북해도 각지의 탄광과 건설장 주변의 「다꼬베야」에 수용됐었소. 견디다 못한 이들이 간신히 탈출에 성공, 이곳 함관 항구까지 빠져 나왔다 하더라도 당시 이곳에 깔려있던 일본인 밀정과 그 앞잡이 한인들 손에 거의 붙잡히게 마련이었소. 그리고 나선 영락없이 심한 매질을 당하고, 다시 본래의 「다꼬베야」에 끌려가거나, 함관 시내의 사창굴에 팔려버리게 돼있었소.
모진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피골이 상접하게 된데다가, 밤마다 뭇 사내들의 수욕에 몸을 내맡겨야했던 이 소녀들이 멀리 고국산천과 맞닿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입대갑에 설 기회가 있었다면 누군들 사신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겠습니까.』
침통한 어조로 이렇게 끝맺은 한 옹의 눈망울에는 번쩍이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전라북도 임실에 태어났으나 본가는 일찌기 절가해서 없고, 그 백씨가 경북 칠곡 어딘가에 있다고 말한 한 옹 (일본명 소전정부)은 이 우울한 분위기를 달래자면서 함관산 (표고 3백35m) 산정의 1류 「나이트·클럽」 <클럽·런던>에 기자를 강제 연행하다시피 끌고 갔다. 「유럽」의 「리스본」, 동양의 향항과 함께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항구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한 옹은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를 또 이렇게도 말했다.

<일인 앞잡이 죄상 가증>
즉, 이곳 입대갑에서 투신 자살한 소녀들은 모두가 부산출 신 60명으로서 송평조·김자조라고 하는 한국인 하청업자들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매음굴로 팔렸다한다.
당시 일인 앞잡이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었던 이들은 배급 나온 식량마저 가로채, 위안부들에게는 전분과 콩 찌꺼기만 지급하는 비인간들이었다고 성토, 고국에 이 사실만은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람 탈을 썼으나, 개·돼지만도 못한 짓을 하던 이들의 죄상이 미워, 지금도 이들이 살아있다면 꼭 민족 정기를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수치를 되살려, 말로만 희생자들을 위로한다고 하지들 마십시오. 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정신을 좀 차려야 하겠읍디다.
먼저 그 당시 이곳에 끌려왔던 징용자들의 정확한 실태라도 파악하고 난 다음 그 유가족들에게 보상하는 길을 찾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아니겠소.』 따끔한 일침임에 틀림이 없다.
북해도에 끌려간 한국인노무자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을 극한 수난상에 대해서는 최근 일본인 변호사들이 주동이 된 북해도 한국인 강제연행진상조사단 (단장 일본 변호사 연맹 미기 인권 위원장)의 조사 결과 (5월15일자 본지 참조) 에도 낱낱이 나타나 있지만, 한 옹의 입을 통해서 들은 각지에서의 실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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