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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71)-연금상태의 나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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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양에 이송되어 「이승엽 간첩사건」을 듣고 청천의 벽력을 맞은 것 같이 눈앞이 캄캄하였다. 이승엽「그룹」들이 간첩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평양경계 안의 파쟁의 결과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단순히 이승엽 일파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남로당원 전부에 대한 일대 정치적 탄압이며 숙청이라고 판단하였다.
나는 이승엽「그룹」은 아니지만 그래도 면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전부터 이런 일이 언젠가는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승엽「그룹」이 독차지하고 있는 중앙당연락 부에는 한번도 찾아간 일이 없었다. 그리고 박헌영에게도 공무 이외의 용건으로는 한번도 접근하지 않고 곁눈도 팔지 않고 밤낮 나에게 맡겨진 사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김일성 파가 나에게 「대남 공작」을 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관계가 아주 악화되어 나의 입장이 곤란할 때에 이 사건이 발생해서 나는 잘못하면 암암리에 말살 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었다. 나는 연금 당해있는 숙소를 몰래 빠져 나와 정보를 수집하여 보니 정태식도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갔다는 것이었다.
이승엽「그룹」과 아무 관계없는 정태식까지 체포되었으면 나도 무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채항석 부부의 일이 염려되었었다. 채항석은 6·25동란 후 서울에서 한때 조선은행부총재까지 했으나 그후 평양으로 후퇴해서는 정태식과 내가 완전히 힘이 없어져버리고 거기에다 그를 등용해준 중앙당간부 부부장인 이범순이 죽고 없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이 내리 먹기 시작하여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오기섭이 사장을 하고있는 조소해운공사에 가서 취직을 하고있었다.
나는 채항석 집을 찾아갔다. 평양교외의 어느 농가의 곁방 한간을 빌어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방문 앞에 솜이 걸려있고 그 옆에 이 빠진 사발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니 나의 눈시울이 그만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아이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채의 부인 장병민이 퉁퉁 부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아 누워있었다. 채 부인은 임신을 하였는데 영양부족으로 유산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산을 하고도 쌀밥 한 그릇·미역국 한 사발도 먹지 못하고 식량이 부족하여 방안에 누워있을 수가 없어 옳게 걸음도 걷지 못하면서 들에 나가 나물을 캐어다 그것을 넣고 강냉이 죽을 끓여먹었더니 열이 나며 전신이 퉁퉁 부어오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으려 하여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대어 통곡을 하고 말았다.
연금을 당하여 돈 한푼 없는 나의 처지, 딱한 사정을 보고도 미역 한줌 사주지 못할 처지니 위로할 말도 없고 그저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채의 부인은 그래도 정태식과 나를 원망을 하지 않는 것이 그는 정말 훌륭하며 교양있는 집 여인이었다.
1953년 봄에 개최된 제3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남로당원 전원에 대한 재 검열이 전당적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벌어졌었다.
이것은 당 세포회의에서 남로당원이 피고가 되고 북로당원이 검사가 되어서 남로당원의 할아버지 때부터의 일까지 낱낱이다 파내어서 그「죄상」을 따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숙청의 비정상적인 정치재판 때문에 대부분의 남로당원들이 불법적으로 추방당하게 되었었다. 남로당원 중에는 이 때문에 자살한자와 정신이상이 된 자도 있었으며, 성급한 사람 중에는 이놈의 지옥 같은 이북은 죽어도 싫다고 이남으로 도망치다가 잡혀 죽은 자도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김일성 파들이 이승엽 파를 미국의 간첩이라고 논증하는 기소장을 봐도 법적 증거는 대단히 희박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승엽을 미국의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기소장을 보면 이승엽의 자백이라 하여 『나는 8·15해방직후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정치적 지위의 보장을 받기 위하여 남조선에 상륙해온 미군의 정책을 지지하며 동정해왔습니다.
특히 나는 l945년9월 서울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의하여 조직된 미군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을 이용하여 조선공산당은 금후 미군의 정책을 지지할 것이며 미국과의 친선관계를 도모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재판기록 제1권 135∼136「페이지」)라고 써놓고 있다. 실제로 이승엽과 조선공산당의 한일을 볼 때 이것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이 기소장을 만든 자들은 무식함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는 임화·박승원이 38선의 경비상황을 이승엽에게 보고하여 이승엽이 「노블」(미국무성촉탁·미군경청 정치고문·그후 미대사관 정치고문)에게 전달하였다고 쓰고있다.
이런 것이 법적 증거로서 효력을 발생하자면38선 경비상황」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승엽이「노블」에게 전달하였다는 날짜와 장소·방법이 명확히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 기소장은 한낱 음모의 작문에 불과한 것이다.
이승엽이 김일성 정권을 타도하고 『우리는 공화국에 수립된 인민민주주의제도를 전복하고 자본가·지주·소 자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부르조아」민족정부들 수립하려 하였습니다』(재판기록 제6권 l88「페이지」)라고 하며 이러한 성격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신 정부의 수상으로 박헌영을 정하였다는 것이다.
부수상에 주영하·장시우, 내무상에 박승원, 외무상에 이강국, 무력상에 김응빈, 선전상에 조일명, 교육상에 임화, 노동상에 배철, 상업상에 윤순달, 그리고 신당의 제1비서에 이승엽을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옹진·개풍·장단·개성지역 등을 합해(북) 경기도를 신설하여 위원장에 박승원, 부위원장에 미 군정청 전 민정장관 안재홍을 배치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기록 제2권 86페이지). 그리고 무장폭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군사분계선 근처에 있던 금강학원을 평양근처의 대동군 대천리에, 강원도 내금강에 있던 홍현기 부대를 평양 대동강 건너편에서 멀지 않은 중화지방에 이전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기소장에는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 많다. 박승원은 서울신문부장을 하였는데 해방일보 정치부장으로 되어있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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