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주섭일 파리특파원 9일간의 견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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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산국 열거에도 등급이…>
「크라쿠프」까지의 기차요금은 1백37「즐로티」(1천6백원).
손짓 발짓까지 동원, 「바르샤바」국제선 역에 당도하여 차표를 받고나니 어쩐지 「바르샤바」를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객차 15량을 연결한 열차는 1등이 2량, 식당차가 하나, 2등이 5량, 나머지 7량이 3등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공산국가열차에 등급이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스럽다.
Y양 제2실 96번이라고 적힌 좌석을 찾아갔더니 창가에 내 좌석만 비워두고 5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한쪽은 복도이고 객실이 줄지어있는 구조가 서구국가의 열차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맞은편에는 40대의 남자가 「폴리티카」라는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 그 옆에는 붉은 반소매 남방에 장발의 20대 청년이 「폴란드」어로된 「카프카」를 읽고 있었고 나머지 3명도 동행인 듯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앉은 청년이 『댕큐, 메르시』하고 농담처럼 말하고 동행들과 웃기에 귀가 번쩍 틔어 『불어나 영어를 아느냐』고 내 딴에는 반색을 하며 물었으나 대답은 『니이에·프랑추스키, 「엥겔스키」』다.

<전 인구의 42.7%가 농민>
말 거는 것을 단념하고 맞은편 사나이의 신문에 눈길을 돌렸더니 「노먼·메일러」의 『마릴린·몬로』가 두 번째 연재 중이었고 「몬로」의 나체사진이 크게 실려있었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본 것이지만 「폴란드」의 농촌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농로는 거의 포장되어 있지 않았으며 농민들이 삼삼오오씩 모여 밀을 베고, 타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밀을 거두어들이고 타작하고 밭을 가는데 아무리 보아도 집단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농가도 한곳에 집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구조도 벽돌로 지은 양옥풍에서 벽돌에 함석을 이은 집, 순 목조가옥, 일층 집이 있는가 하면 2층 집, 실로 여러가지형태에 TV「안테나」가 있는 집과 없는 집 등 가지가지였다.
뒤에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돌아가던 찻 속에서 만난 「A·R·사레르노」라는 학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폴란드」전 인구의 42.7%가 농민, 면적의 63%가 경작지인데 농가의 84%가 개인 소유이며, 나머지 16%만이 국영농장이나 협동농장이라는 것이다.
「바르샤바」를 떠난지 4시간15분만인 밤8시35분 「크라쿠프」역에 도착했으나 이번에도 「호텔」방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30m쯤이나 늘어선 행렬에 끼여 45분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폴스키·피아트」(「바르샤바」에서 생산되는 「피아트」)를 타고「크라코비아」라는 「호텔」로 달렸다.

<일본여대생 만나 술 마셔>
「택시」를 대기시켜놓고 안내에 가 『방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오늘 밤만이면‥』이다.
「레스토랑」에는 미국·소련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찼고 4중주악단이「쇼펭」의 이별 곡을 연주하고있었다.
자리를 찾노라 두리번거리는데 『일본에서 왔느냐』고 일본어로 묻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도대생이라는 그녀는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 「모스크바」·「키에프」·「바르샤바」를 거쳐 이미 「크라쿠프」등을 3일 동안 관광했다한다.
이 집 특별「메뉴」라는 「버터」묻힌 생선구이에 핏빛 나는 「수프」를 마시고 난 후 일본여학생과 「스낵·바」에 들어가 「폴란드·보드카」를 2잔씩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크라쿠프」에서도 벙어리 시늉은 매일반이라 시내 구경은 ORBIS(「폴란드」국영관광공사)의 단체관광단에 끼여드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상오10시-.
「버스」에는 「뉴질랜드」할머니 2명. 미국에서 온 5인 가족, 「루마니아」대학생 3명, 「프랑스」인 중년 부부가 타고 있었다.
한참동안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불어를 하는 중년부부 곁으로 가서 인사를 청했다.
노란 피부의 사나이가 자기 나라 말로 얘기를 거는데 대해 이만저만한 반색이 아니었다.
그들의 반색은 내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폴란드」에 온 신문기자라는 사실을 알자 사뭇 경악으로 변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표정의 허풍」도 있었겠지만 여하튼 호들갑스럽다할 정도로 놀라와한다.
그 때문인지 「미셸」이라 자기 소개를 한 이들 부부는 헤어질 때까지 이틀동안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버스」는 어느덧 4㎞쯤 교외로 나가서 야트막한 언덕 위의 고성에 도착했다.
25세 가량의 「니타」라는 안내양은 불어·영어·「루마니아」어로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 얘기해줬다.

<옛 수도「크라쿠프」돌아봐>
인구60여만인 「크라쿠프」시는 10세기말부터 16세기말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다는 것. 그리고 이 고성은 15세기께 「달탄」인들이 침입했을 때 이 도시를 지켜준 유서 깊은 곳이라는 것 등을 순식간에 얘기한다.
다음 「코스」는 1364년에 건립된 「크라쿠프」대학건물. 이곳은 「크라쿠프」대학이 교외의 새 건물로 옮겨간 뒤 대학기념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었지만 온통 「코페르니쿠스」판이어서 「코페르니쿠스」박물관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1473년에 태어난 「코페르니쿠스」가 이 대학에 온 것은 18세 때. 지난2월19일 그의 5백주년. 기념행사 때는 온 시내가 며칠씩이나 「카니벌」을 벌였다고 한다.

<온화한 할머니 꽃장수들>
다행히 박물관의 한 쪽 구석에는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소 전시회가 열려있어서 몇몇의 유품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썼던 필기도구와 「노트」, 지동설을 주장한 졸업논문 등이 옛날의 손때묻은 모습 그대로 정결히 보존되어있다.
성모「마리아」교회 옆 광장에 있는 10세기 이래의 유명한 꽃시장의 꽃장수들은 대개 할머니들인데 손님들이 와도 온화한 미소만 지을 뿐 권하거나 값 때문에 다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중세 때 감옥으로 썼다는 지하식당에서 「니타」양에게 슬쩍 월급을 물어봤더니 5천「즐로티」정도(약6만원)란다.
「파리」에서 2년, 「런던」에서 1년6개월, 「모스크바」에서 1년을 근무한 「베데랑」치고는 별로 많은 월급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가지고 살만하냐』고 했더니 못들은 척하고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건다.
길가를 어정대다 『「파리」에서 한 3년 굴러먹었다』는 「크라쿠프」대 미술교수를 만나 지하「바」의 순회에 나섰다. 「폴스키·비냑」이라는 한국의 막걸리처럼 「폴란드」의 특산으로 치는 독주를 몇 잔인가 들이켜고 소시민들의 살림살이 걱정에서부터 세계평화까지를 부지런히 논한다.
청년교수께서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잠깐 놀라는 척 했을 뿐, 전혀 문제삼지를 않는다.
예술가특유의 「코즈모폴리터」적인 사고방식이 완전히 몸에 밴 것 같았다. 수다장이 「미셸」부부로부터 「크라쿠프」에서 멀지 않다는 귀뜸을 받아 유명한 「아우슈비츠」「나치」수용소를 찾은 것은 「크라쿠프」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우슈비츠」수용소관람은 오전에 영화, 점심 후 수용소관람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영화관에서 보여 주는 영화는 「나치」가 찍어 두었던 것, 수용소안 유대인 저항단체가 비밀리에 촬영해서 「폴란드」저항단체에 전했던 것, 소련적군이 해방시킬 때 촬영한 것 등을 편집한 2시간 짜리 기록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수많은 관광객들의 흐느낌이 나의 귀를 두드렸다. 부녀자들이 목욕을 한다고 옷을 벗고 이른바 「개스」실로 들어가는데 미처 못 들어간 50여명이 우왕좌왕하자 친위대원이 10여 마리의 개를 풀어 마구 물어뜯게 해서 밀어 넣는 장면이 나오자 모두들 오한에 떨었다. 「개스」로 학살한 다음 머리를 깎고 금이빨을 뽑아 화장터로 옮길 때의 끔찍한 장면, 교수형에다 집단총살, 구덩이에 넣어져 미처 태우지 못한, 그야말로 시산, 금이빨과 머리카락의 산, 그리고 몸은 뼈만 남았으나 머리만 커다랗게 발육한 어린이들…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나치」학살 기록영화감상>
수용소의 철조망 안에는 모두 28개의 붉은 2층 건물이 3열로 정렬되어 묵묵히 서 있었다.
이 「블록」속에서 집단학살이라는 이름의 사상 최악의 죄악이 자행된 것이 사실인가 싶을 만큼 건물은 견고하게, 그리고 깨끗이 정렬되어 있었다. 또 그 주변엔 「포플러」나무가 줄지어 섰고 화단과 잔디밭까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제4「블록」에는 각종 기록문서·사진·희생자들의 머리카락·가방 등 유류품과 「나치」의 채찍을 비롯한 살인도구들이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고 제6「블록」에는 절망조차 없었던 수용민들의 일상생활이 참혹한 사진들과 더불어 전시 중이었다.
제10「블록」은 친위대의사들이 20∼30대의 건강한 남녀 수백 명을 골라 『멸종을 위한 의학실험』을 했던 곳이며, 제11「블록」은 「개스」실과 수많은 고문 감방이 있는 「죽음의 집」·「나치」의 군모·방망이·채찍 등 온갖 고문기구가 그대로 보존된 16개의 고문실, 「게슈타포」가 「샤워」장 또는 목욕탕으로 불렀던 「개스」처형 실에 들어선 순간 온몸이 오싹 떨리는 것은 나만의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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